【개구리-할머니-나-기계-지구-괴물】
남쪽 산자락에 있는 할머니 집에 왔다. 동생과 내가 계속 학생이었기 때문에 지난겨울까지는 한여름과 한겨울에만 할머니 집에 왔었다. 이번엔 마을 입구에서 창문을 여니까 아카시아 냄새가 흠뿍 들어왔다. 이곳에선 불 냄새, 풀 냄새, 흙냄새, 이슬 냄새, 햇빛 냄새, 꽃 냄새, 할머니 냄새밖에 안 난다. 갑작스레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언가가 가득한 곳에 오니까 너무 생소해서 편안했다.
마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산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비가 올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잠금을 풀고 날씨 어플을 켰다. 맞네요, 내일 아침부터 비 온대요, 할머니. 그제, 그기 그기에 다 나오나. 청깨구리가 개골개골 우는 걸 보모, 비가 올랑갑다. (…) 내가 청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나?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다는 노래는 언제 잊어버렸지? 할머니를 만나면 신기한 게 너무 많다. 할머니는 내가 신기하고,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한다.
폐뿐만 아니라 피부로 호흡하는 개구리는 공기 중 수증기가 많아지면 물 밖으로 나와 산소를 받아들이면서 노래를 부르며 비가 올 것을 알리고, 개구리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할머니는 그 노래를 들으며 비가 올 것을 알고, 슈퍼컴퓨터가 방정식을 계산해 비가 올 확률을 알리고, 연구원들이 데이터를 해석하고, 개발자들이 날씨 예보를 전해주는 어플을 만들고, 나는 어플을 보며 비가 올 것을 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구와 생명체와 기계는 서로 기호를 내뿜고 전달하고 해석하고 있다. 할머니는 청개구리의 마음을 읽고 나는 디스플레이의 마음을 읽으며 지구의 마음을 전달받는다. 할머니가 열아홉 살부터 살아온 산마을에서도, 내가 스물아홉 살까지 살아온 도시에서도, 지구와 생명과 기계의 기호를 해독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기호 해독은 기호 송신자의 마음을 읽는 일이고 이는 기호 송신자가 되는 일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 차고 우리의 감각 기관이 기계의 데이터로 가득 찰 때,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된다. 개구리와 합쳐진 할머니, 기계와 합쳐진 나, 개구리와 합쳐진 할머니와 합쳐진 기계와 합쳐진 나, 이런 모든 것들과 합쳐진 지구. 우리는 모두 신기한 괴물들이다.
괴물(怪物). 괴(怪)라는 글자는 심(心) 자와 골(圣) 자가 합쳐진 것이다. 골(圣)은 손으로 흙을 가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손으로 흙을 갈면 흙은 구겨지고 어그러진다. 그럼으로써 겨우내 딱딱해졌던 흙은 부드럽게 되어 무언가를 심어 기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물론 흙은 이미 그 자리에 있던 것이고, 손이 없어도 생명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흙과 손이 만나는 순간, 지구와 인간의 공동 역사가, 그러니까 지구가 일방적으로 인간을 덮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일방적으로 지구를 착취하는 것도 아니라 지구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하는 일들이 서로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손이 흙을 만지면, 흙이 무언가를 만들고, 손은 흙으로부터 나온 그것을 꺼내 먹고, 흙에 거름을 줘서 땅심을 키운다. 손과 흙은 서로를 헝클이고 묻히며 동시에 변형되는 것이다. 그럼 ‘괴(怪)’라는 글자는 흙과 손의 마음이란 뜻일까? 흙의 마음과 손의 마음이 얽혀 탄생한 기이하고 괴상한 마음을 가진 물건. 그 괴물은 서로의 살을 나눠 먹음으로써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다.
지금의 인간은 아무에게도 살을 내어주지 않는다. 한 방향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자연의 질서가 수직적 먹이사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는 인간은 자신에게 먹히는 비인간 존재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구—그리고 지구 안의 비인간 존재들—와 인간이 그물처럼 엮어 온 역사는 유일한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수동자로서의 환경—여기에는 주체로 취급되지 않는 인간도 포함된다—을 다루는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역사로 오해되어 왔다. 스스로가 합체하고 변신할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망각한 인간은 지구와 생명이 보내는 암호를 해석할 역량을 잃어버렸다.
그런 인류에게 아주 강력한 신호가 배달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곳곳으로. 이제 우리는 지구와 생명으로부터 알고 싶고 갖고 싶은 것만을 찾는 게 아니라 알아야 하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인간이 선해서라기보다 그게 인간에게 좋기 때문이다. 윤리는 착함이 아니라 좋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동안 자신을 실험의 통제자이자 수익자로 착각했던 인간은 범람하는 세포들, 미생물들, 바이러스들과 요동치는 집기들, 먼지, 실험실이 자신의 동료였음을 깨닫고 있다. 이제 인간의 과학과 역사는 공동수익자로서의 비인간 지구 괴물과 합의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시개벽』의 이번 여름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묘사하려 한다. 통제 불가능하지만 길들여야 할 괴물로 취급받는 지구, 치료해 줘야 할 흉물로 시혜 받는 지구, 자신 안의 비인간을 알지 못하는 인간 사이에 감춰진 채로 서로를 변형시키며 함께 진화하고 있는 괴물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괴물 모험 지도 그리기】
이번 『다시개벽』 여름호는 <다시쓰다>-<다시그리다>-<다시열다>-<다시읽다>-<다시잇다>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괴물들의 출몰 강도가 리듬감 있게 느껴지길 바라며, 다음의 지도가 모험에 유용하기를 바란다.
받아 적기를 넘어 새로 또 스스로 쓰기를 지지하고자 하는 <다시쓰다>에는 오세란, 최석현, 손성규, 김서형, 신혜린, 김동민의 글을 담았다. 오세란의 글은 “인간중심주의란 성인중심주의다”라는 강렬한 구호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아직 인간이 아닌 것’으로 규정해 온 ‘성인인간’중심주의에 비판을 던진다. 성인 누구나 그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화되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인간 삶 안에 내재하는 비인간의 존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글은 동심을 가진 작은 천사 또는 중2병을 앓는 환자로 투사되는 소극-괴물적 이미지를 벗겨내고 자연 또는 환상과 교감하며 변신하는 적극-괴물적 아동·청소년 문학 읽기를 제안함으로써 누락된 삶의 역량을 회복하고자 한다.
최석현의 글은 2000년 이후 대두된 인류세(Anthropocene) 논의에서 ‘인류’ 개념의 문제만큼이나 시간 구분으로서의 ‘세’ 개념 역시 문제적임을 지적하며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논의하는 이론으로서 브뤼노 라투르의 가이아 지구론과 객체지향 정치를 참고한다. 이는 역사라는 연극에서 무대 환경에 불과했던 지구가 무대를 뚫고 올라와 배우 즉 행위자로 등장했음을 알린다. 글은 직선적 시간과 불변하는 공간이라는 근대적 시공간이 무너진 세계에서 비인간 행위자들과 만나는 과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손성규의 글은 이 세계가 먼저 끝날지 자본주의가 먼저 끝날지 내기하는 듯한 불확실한 생태적 파국 앞에서, 불안한 가상이 범람하고 끔찍한 언어가 폭주하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프레데릭 켁, 베르그송, 에두아르도 콘 등 인류학의 풍부한 토양을 이용하여 억압과 금지의 언어를 넘어 불확실성 즉 새로운 생성과 접속하는 길을 가리킴과 동시에 우리의 부족한 언어를 다시 한 번 돌보기를 요청한다.
김서형의 글은 특정한 민족 또는 국가 중심의 해석을 넘어 지구를 역사의 단위로 파악하는 새로운 역사학인 지구사 개념에 따라,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전염병과 인간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 왔는지를 2백만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기술한다. 신혜린의 글은 현실과 다르기에 지향해야 할 이상적 존재임과 동시에 어딘가 문제가 있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 버린 자연의 양가적 이상(理想/異常) 상황을 묘사하며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꿈꿀 자격이 없는 것만 같은 인간 주체를 비판한다. 결국 횡적 전멸, 종적 절멸, 개체적 소멸로 향하는 인류세의 우울한 결말을 향해 가는 인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을 넘어선 자기 파괴와 변신을 기대해야만 하는 인간으로서 고민하고 있다. 지난 봄호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되는 김동민의 글은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문과 vs 이과’의 문제를 담고 있다. 농담으로 때론 진심으로 사용되는 문이과의 싸움은 이미 문화가 되었다. 글은 인문학의 문화와 자연과학의 문화 사이의 단절을 둘러싼 담론들을 쉽게 소개한다.
감각을 그리는, 다시 말해 표현하고 상상하고 사랑하는 문예 작품을 모시는 <다시그리다>에는 김선오, 김경후의 시가 있다. 문학을 요약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담고, 쌓고, 모이고, 또 떠나려는, 그러나 남겨지고 묻어지는 모습이 후련하게 아팠다. 뿐만 아니라 김은정의 드라마 「스위트홈」에 대한 문화비평이 있다. 이질적 신체 또는 괴물의 비이성을 전시함으로써 정상 인간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던 근대적 크리처와 반대로 오히려 인간 주체 내부의 불안한 욕망을 폭로하는 「스위트홈」의 괴물들을 반(反)근대적 괴물이라 평가하면서도, 기존의 휴머니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기쁘게도 이번 호에는 <다시열다>가 부활했다. <다시열다>는 완결을 거부하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굳은 체계에 구멍을 뚫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공간이 되고자 한다. 바론 문재훈은 스스로를 ‘세월호 세대’이자 ‘코로나 세대’로 명명하며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급변의 시대에 무엇이 영원히 옳은 일인지를 고심한다.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존엄한 존재이며 이런 낯선 존재들과의 연대 속에서 담대한 명랑함을 얻을 수 있다는 답을 찾았으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곳으로 가는 힘을 얻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이전의 문제적 텍스트를 검토하는 <다시읽다>에서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에 대한 임예슬, 이아람의 글을 담았다. 임예슬의 글은 소수자성과 다수자성을 함수화하여(y(다수자성)=a(나)/x(소수자성)) 그래프를 그리며 온전한 다수자도 온전한 소수자도 될 수 없었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산해 본다. 그 결과 모든 되기와 변신의 동기는 사랑이란 걸 믿으며 앞으로의 변신을 다짐한다. 이아람의 글은 곤충-되기와 여성-되기의 관계를 통해 신체 변형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상력이 가지는 근대적 휴머니즘으로부터의 탈주를 중요시한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한국어로 편히 읽을 수 있도록 문제적 텍스트를 번역하는 <다시잇다>에서는 지난 호 최한기의 『지구전요』 서문에 이어 범례를 김봉곤이 번역해 주었고, 『개벽』 제4호(1920.10)의 사설 「인도정의 발전사로 본 금일 이후의 모든 문제」를 박은미가 번역해 주었다. 경험주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최한기의 앞의 글은 책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범례를 정리해 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간혹 그의 답답함과 유쾌함이 보여 재밌고 놀랍다. 뒤의 글은 억압받아 온 인간 정의의 생명력 넘치는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의 끝까지 거치는 것이 필요하며 지금이 바로 그 죽음과 같은 화를 겪고 있는 기회임을 주장한다.
다시, 흙의 마음과 손의 마음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괴물을 떠올려보자. 나는 흙의 마음은커녕 나 자신의 손과 몸의 마음도 알기 어렵다. 바다에 다녀온 지 며칠 되었는데도 손발톱에, 머리카락에 모래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묻히고 다니다 보면 변신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많이 얽히고 섞이고 겹치며 살고 싶다. 모두에게 묻고 싶다. 우리 변신 놀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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