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개벽 제2호 편집후기

글: 성민교, 이원진

사랑, 바람, 날개, 랄랄라

한여름, 빨간 버스를 타고 파주에 갔다. 담쟁이덩굴이 연회색 외벽을 타고 있는 날개의 작업실에서 날개와 새별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날개는 부지런하고 느긋하게 차를 끓여주고 새별과 나의 티키타카를 아이 같은 얼굴로 관찰하다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방을 꽉 채운 책꽂이에서 그동안 작업해 온 것들을, 25년 전의 것부터 그날 아침의 것까지 쓱쓱 꺼내 보여주었다. 날개가 하는 말들은 대개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였다.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사랑도 말해주었다. ‘사’에서 ‘랑’으로 넘어갈 때 그 ‘ㄹ’의 묘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그러니까 손이나 발을 움직이거나 눈썹이나 입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가 가벼운 바람을 닮았다고 느꼈다.
바람은 변화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매순간 움직이는 공기는 우리의 피부를 지나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우리는 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만을 느끼기보다 바람이 피부를 스쳐간 자취를 느낀다. 문득 느껴진 바람이 생그러운 이유는 스치며 지나가는 그 변화에, 이전과 이후의 전환에 있는 것 같다. 너무 익숙해서 굳어 있던 내 몸은 늘 움직이고 이동하는 바람의 흔적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다. 사실 날개를 인터뷰하러 간 날 두통이 너무 심해서 눈알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마 날개도 새별도 내가 아프다는 걸 몰랐을 거다. (아닌가? 그들은 너무 사려 깊고 깨끗한 눈을 가져서 아셨을 수도 있다.) 그날 나는 신이 나면 고통이 비워지고 말이 생각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계속해서 흐르는 날개가 너무 아름다웠고, 나는 말금해졌다. 바람과 사랑의 ㄹ은 다석 류영모가 말했듯이, 바보새 함석헌이 말했듯이, 날개 안상수가 말했듯이 변화와 운동의 기호이자 흔적이다. 날개의 ㄹ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싶어서, 질척대며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1년 반 전쯤 산뜻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나도 날개처럼 산뜻한 흔적을 남기는 어른이 되고 싶다. 진심으로. 참, 저 석사논문 다 썼어요. 제가 다음 순간에 어디에 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행복해요. 바람을 따라, 사랑을 따라 열심히 읽고 쓰고 살겠습니다. 랄랄라.
편집위원 성민교 모심

흔적을 알아보다

느낌은 ‘늦다’와 바탕을 함께하는 말이다. ‘느낌이 있다’는 것은 ‘늦은 것’이다. 느낌은 반드시 경험한 다음에 인식되기에 늘 존재(‘것’)보다 늦게 인식된다. 지각은 감각이 종합된 상태의 ‘얼’이다. ‘얼’은 ‘늦’이 모여 살얼음처럼 얼은 이미지다. ‘얼추’, ‘얼치기’ ‘얼렁뚱땅’, ‘어림짐작’에서 보다시피 대강의 이미지다. ‘얼’이 ‘넋’이 되면 흐릿한 이미지가 또렷하게 변한다. 얼의 이미지를 기억 속 범주로 또렷하게 이해한다. 방향을 갖고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넋’과 동녘, 서녘의 ‘녘’과 바탕을 함께하는 말이다. ‘넋’들이 모이며 ‘알’이 된다. ‘알’이 ‘앎’이다. 즉 ‘것’을 최초로 인식한 ‘늦’이 모여 ‘얼’이 되고 흐릿한 ‘얼’이 모여 또렷한 ‘넋’, ‘넋’이 모여 ‘알’이 되면 통찰이 일어난다. (한국학자 최봉영의 페이스북 강의를 기록한 윤여경의 브런치 글에서 구성해 인용)
이번 봄 호의 주제는 ‘형상과 흔적’이다. 수운 최제우가 먼저 동학에 대해 평하며 “우리 도는 인위적인 것이 없는 변화다. 형상은 없으나 흔적이 있다”고 했다. 해월 최시형은 이를 이어 ‘감각되어도 감각할 수 없다(視之不見 聽之不聞)’고 했다. 그렇게 이번 호는 “학문에서 아직 또렷이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이 은연중 느끼고 있는 바를 민감하고 날렵하게 포착하여 표현하는(홍승진 편집장의 권두언)” 문화예술 분야의 흔적을 담아냈다.
내가 이해한 흔적을 한국말로 하자면 존재(것)보다 늦은 앎이 구성되는 궤적이다. 이번 호의 또 다른 글에서 야뢰 이돈화는 외래 사상을 열심히 수입하고 받아들이는 대식가로서의 한국 사람들이 ‘알=앎’이라는 형상, 즉 자주적 생각을 만들지 못했다는 한탄을 쏟아낸다. 돼지를 먹고서 살로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돼지를 안고 있는 꼴, 소를 먹고서 ‘살’로 바꿔내지 못하고 그대로 소로 얹혀놓고 있는 문제를 ‘위장’에 비유한다.
생각의 ‘소화’를 주제로 했으니 한번 생각해보자. 소화기관에서는 어떤 것이 자생적 사유라고 할 수 있을까. 위는 사람의 몸에서 신축성이 가장 좋은 기관이다. 끝도 없이 늘어난다. 음식물을 살균하는 강한 위액(胃液)이 잘 분비돼서 음식물과 잘 섞여 잘게 부수어야 하는데, 그 위액이 자생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대식가일수록 더 많은 위액을 분비해야 하는 셈이다. 곱씹을수록 ‘위’라는 메타포를 한국 사람의 생각과 비견한 예는 매우 탁월하다. 대식가의 욕망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위를 튼튼히 하면 된다.
신축성은 흔적을 남긴다. 확장과 수축의 운동을 하면서 궤적을 그린다. 순환적이면서 또 방향을 갖는 운동을 한다. 동일성과 변화의 움직임이 동시에 이뤄진다. 홍승진 편집장의 글에서 보듯 이것은 ‘다시개벽’을 이끄는 내재적 신성의 춤이다. 함석헌 선생은 ‘앎’은 ‘앓음’이라고 했다. 우리의 도(道)는 위가 한번 앓고 뱉어내는 흔적이다. 다 부서지고 흩어져 형상은 없어도, 흔적이 흡수되고, 자취를 남긴다.
어제 2020 선댄스 영화제 미국 극영화 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관객상 수상작인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과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함께 만나 대화하는 영상을 봤다. 미나리 씨앗이 미국에 정착하는 ‘원더풀’한 과정을 통해 호평을 받았다. 한국 사람의 살려내고 살아내는 삶을 묘사해 세계에 알리고 공감을 받은 이들은 서로의 작품 스타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인생, 윤여정, 스티븐 연, 한예리 등의 영화배우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알아보고’ ‘알아주는’ 수다를 이어갔다.
최봉영 선생은 ‘늦’이 ‘알’로 바뀐 후, 한국 사람들이 잘 하는 6개의 ‘알’을 제시한다. 그는 복과 덕을 주고받으려면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래야 서로 ‘알아내고’ ‘알아주고’, ‘알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개벽』을 이끄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린다. 알아보는 것은 보지만 다 본 것이 아니다. 알아듣는 것은 듣지만 다 들은 것이 아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얼과 넋의 흔적을 찾아서 줍는다. 이렇게 움츠러든 생각을 펼쳐내고, 막힌 숨통을 ‘알’로 트여낸다. 그 알은 미나리처럼 ‘원더풀’하게 바람에 흩날리며 생명력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오늘도 신나게 ‘알’아 보자. 새해에는 더 잘할 것이다.
-신축년 새해에 이원진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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