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개벽 제3호 편집후기

글: 홍박승진

감성개벽으로서의 학문

시인 김수영은 인간의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을 ‘절망이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절망 속에 빠져 있어도 그 절망을 반성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 절망이 절망인 줄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절망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가장 깊은 절망의 늪 한가운데로 인간을 몰아세운다. 물론 이것은 개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 탓이다. 피라미드 사회가 그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개개인의 자존감을 끝없이 박탈하므로, 스스로를 사랑할 힘도 모자란 개개인에게 스스로를 반성할 힘이 남았겠는가. 현대인들이 ‘반성하라’는 양심의 호소와 맞닥뜨릴 때마다 불쾌감과 혐오감의 이빨부터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맞서는 까닭은 그들 자신을 지키는 일에 안간힘을 쏟아야 하는 탓이다.

가장 깊은 절망일수록 가장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가장 깊은 반성이란 적당한 반성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깊은 반성이란 반성을 극한에까지 밀어붙이는 일, ‘이런 것까지 따져 물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까지 면책특권의 비호를 받아 왔던 모든 것을 비판의 시험대 위로 소환하는 일, 그리하여 그 물음의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온몸이 벌벌 떨리게 하는 일[身多戰寒(최제우, 『동경대전』「동학론-논학문」)]이다. 나는 현대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장 깊은 반성이야말로 오늘날 학문의 사명임을 절감한다. 학문이라는 낱말에는 배움[學]과 물음[問]의 두 가지 뜻이 함께 들어 있다고 조동일은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배움의 가치는 그 배움이 가장 깊은 물음, 가장 깊은 반성을 얼마만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기후위기 시대를 맞이하여 여러 학문 분과에서 탈-인간중심주의적 지구학을 활발히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지구과학에서는 산업문명이 현재와 같은 생산 및 소비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생태계 전체가 회복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함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안다고 하더라도 과연 현대적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지구법학에서는 비인간에게도 법적 주체로서의 권리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에 아무리 동의를 하더라도 인간들의 마음에 개벽과 같은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과연 인간이 비인간에게 참정권을 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지식들은 그동안 ‘인간’의 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옳다. 하지만 너무 올바르기만 한 말은 어쩐지 잔소리 같다. 귀에 딱지가 앉는 백 번의 잔소리보다도 마음을 움직이는 한 번의 충격이 낫다는 것이 요즘 내가 학문을 하며 새로 되새긴 신조(信條) 한 가지이다.

인간이 지구에게 미치는 영향만큼 지구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는 브뤼노 라투르 등의 분석도 좋다. 객체지향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등, 좁은 의미의 인간 범주와 그것의 특권화를 무너뜨리는 여러 이름의 학설들도 재미나다. 그러나 지루한 학술대회에서도 어쩌다 가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발표 한두 개쯤은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인가를 진리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무엇인가 드러나는 사건이 내 마음속에 ‘너의 삶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울림을 던져줄 때에 나는 그 무엇인가를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마음개벽을 일으키는 사건으로서의 진리, 바로 그것이 배움과 물음의 동시적 발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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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며 파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욕망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더 많은, 더 다양한 감각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이다. 비단과 향신료가 주는 시각과 후각과 미각의 만족을 위해서 제국의 영토 확장과 세계무역 발달이 이루어졌다. 소고기를 더 많이 먹기 위해서 열대우림을 밀어버리고, 물고기를 더 많이 먹기 위해서 바다의 씨를 말린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문제라고 떠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더 강렬한 감각 추구가 과연 정당한지를 문제시하는 것은 인류문명의 근본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다. 누구보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물론 이 시기의 마르크스 철학은 낭만주의적 인간학에 머무른 단계로 여겨지지만, 후기의 마르크스가 그것을 얼마만큼 넘어섰는지는 의문이다―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자본이라는 가치로 획일화시키는 데 있으며, 그러므로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의 정당성은 인간의 무한한 감각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 강렬한 감각을 욕망하는 것, 이것을 부정하고 억누르는 것은 유불선(儒佛仙)과 기독교 등의 재래 종교사상에서 오래 해 온 일이다. 이것을 긍정하되 어떠한 방식으로 긍정하느냐의 문제가 자본주의적인 사유와 반자본주의적인 사유의 갈림길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늘날의 마르크스라 할 만한 들뢰즈의 철학도 이 문제에 걸린다. 그의 사유는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욕망의 차이와 생성, 그 무한한 잠재성 속에서 현실화되는 욕망의 강렬함(intensity, 强度)을 긍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의 증가 자체가 지구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하는 기후위기의 시대에는, 인간이 숨 쉬며 사랑하는 일 자체가, 그것이 아무리 반자본주의적인 욕망을 따를지라도, 생명 파괴의 과정 속에 휩쓸려버리는 느낌이다. 반자본주의적인 욕망이라면 어떠한 욕망이든 긍정할 수 있다는 68혁명식 슬로건의 공허함을 떨쳐내는 데 들뢰즈 철학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만용을 용서하시라.

나는 문학인이고, 문학은 언어예술이며, 예술은 감성론이다. 나의 주요한 관심 가운데 하나는 동학의 개벽사상을 감성개벽론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들뢰즈가 우주를 차이와 생성의 흐름으로 사유했다면, 동학은 지극한 우주 전체를 지극한 힘[至氣]의 표현으로 사유하면서 그 우주 만물에 가득한 하나의 힘[渾元之一氣]을 하느님[天主]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侍天主]은 곧 모든 생명의 마음속에 하느님으로서의 우주적 잠재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학도 더 강렬한 감각의 발현을 부정하지 않는 사유의 한 갈래다. 들뢰즈의 철학은 그것을 차이 그 자체, 또는 생성 그 자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모든 종류의 혁명 자체를 긍정하는 사유 같다. 동학은 우주 전체를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하나의 힘을 하느님으로 공경하며 모신다는 점에서 다른 것 같다. 긍정과 모심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진리-사건이다. 전자가 감성혁명론이라면 후자는 ‘감성개벽론’이라고 제멋대로 명명해본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나에게 아직 미지수이다. 감성개벽이라는 물음거리는 과연 얼마나 강렬하게 가장 깊은 물음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이것이 내 학문에서 떠오른 것 중의 가장 새로운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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