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공동체
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싸움이 잘 일어난다. 하지만 싸움과 폭력을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사실 물리적 폭력만 폭력이 아니고 언어적 폭력도 폭력인지라 폭력이라는 말을 두고 적용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이 폭력의 나날이 되버리고 만다. 거기에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가 설정되면 곧 죄와 벌이 따라온다. 사람이 사라지고 재판정이 돼버린다.
정부에서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관련된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학교폭력 신고센터와 학교폭력위원회 등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지만 순기능과 더불어 역기능도 많다. 외부의 사법적 시각이 가진 문제야말로 권력의 개입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보완으로 학교에서는 회복적 정의 방식을 적용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는 난처하다. 사안에 따라서 아이들끼리의 싸움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과 일방적 폭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다르고, 설사 그것이 폭력이더라도 폭력에 대한 대응방식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전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적 이해와 화해의 방식을 찾으려 노력을 하려다가 폭력 문제를 학교가 은폐 축소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일단 왕따나 폭력으로 규정되고 불리기 시작하면 인간적인 이해와 해결의 방식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학교가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기능도 하는데, 사회의 잣대가 학교에 그대로 적용되면 가해와 피해의 사법적 구도 속에 상처가 깊어져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함께 문제를 풀고 해결하겠다는 공동의 의지가 모아져야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공동체의식이라는 게 쉽지 않다. 학교가 이미 수요공급의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안학교라고해도 특별하지 않다. 많은 학부모들이 우리라는 공통의식이 부족하다. 사회적 구조의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내 아이 내 자식 위주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위기가 찾아오면 내 아이 내 자식을 내세우며 자기가 결정을 해버린다. 이렇게 신뢰가 끊어진 학교는 무력하고 공허한 곳이 돼버린다. 부모와 학생, 교사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신뢰받지 못하는 교사도 설 자리를 잃고 탈진한다.
교사로서는 부모들이 저 아이도 나의 아이라고 그래서 모두 우리 아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가난하고 몸과 마음에 어려움이 있고 다양한 차이를 가진 아이들을 모두 우리의 아이라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을 내 아이와 함께 바라보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대부분 내 아이만 바라본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오면 책임과 자책, 불안에 휩싸여 학교에 대한 신뢰를 거두게 된다. 학교에서 공동체라는 허울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 요즘은 공동체가 불가능한 시대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공동체는 물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었는데 학교공동체라는 말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성을 요구하고 필요를 강변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당위로서의 공동체는 이미 공허한 모토이며, 공동체 주장은 도덕적 꼰대짓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 좀 아니면 어떤가? 현대인은 더 이상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진정 대안을 모색한다면 오히려 공동체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교사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도. 그래야 집착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기대하는 것이 없어야 오히려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와 언니
윤가은 감독은 공동체의 파괴와 관계의 회복을 아이들의 시각에서 섬세하게 풀어낸 두 편의 장편 영화를 내놓았다. 『우리들』과 『우리집』이다. 감독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현실의 문제를 더 아프게 드러내고 반문한다. 앞의 영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어른사회의 경쟁과 복수 논리에 대해 천진한 동생의 입을 빌어 ‘싸우기만 하면 언제 노냐’고 반문한다. 뒤의 영화는 그렇게 지켜내려고 애를 쓰던 ‘우리집’이 파괴되자 그렇다면 ‘우리언니’가 될 수 없냐고 반문한다.
약육강식의 경쟁이 지배하는 시장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서 노동과 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인간 공동체는 파괴되어야 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가 인간의 다양한 존재유형을 해체하고 노동자와 소비자로 재형성하며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도 상품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소외시키고 상품으로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다. 스펙, 자기계발, 자기관리는 인간의 상품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어른들의 사회는 그렇다.
하지만 아이들의 현실은 어른들의 현실과 차이가 있다. 아이들은 어른의 도움이 더 필요하다. 나이가 어릴수록 어른의 보호가 더 필요하다. 더 사회(공동체)를 요청한다. 어른들이 더 이상 가족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가족에 집착하는 이유다. 하지만 아이들도 어른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상처를 안고. 그것이 아이들이 살아야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른과 공존하기 위해.
윤가은 감독은 공동체의 해체를 말한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 두 편 모두 끝끝내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발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친구’와 ‘언니’로 불리는 연대라는 이름의 공동체다. 이런 ‘우리’야말로 생성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생성하는 공동체
인간은 연대다. 한자어의 뜻 자체가 사람 인(人), 사이 간(間)으로 연대를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사회적 존재지 홀로로서는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시회(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푸코가 말한 ‘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나는 이렇게 전유한다. 하지만 기존의 사회(공동체)는 이미 깨졌다.
자본은 인류가 지구 위에서 번성하며 만들어낸 무수한 사회(공동체)를 파괴하고 오직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를 강제했다. 처음에는 국가폭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발적 복종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 안에서 원자화된 인간의 소외는 전제조건이다. 소외되어야 노동하고, 소외되어야 소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야 자본주의 사회는 작동한다. 한동안 욕망을 찬양하고 긍정하는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억압에 대한 자유의 표출임과 동시에 자본의 시대적 강제이기도 하다. 자본은 소외된 개인들의 욕망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사회다. 자본이 아니어도 원래 사회다. 자본의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본연의 사회(공동체)라는 바탕 위해 다양한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아니 대안으로서 만들어내야 한다. ‘친구’와 ‘언니’로 불리는 연대의 시대적 요청이다.
나는 앞에서 한자어 인간을 상기했다. 그러나 인간을 상기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발견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의 뿌리다. 언젠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을 제거하고 동등한 인간을 발견하고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자고 말한 것도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의 불완전함과 약함을 성찰하고, 타인에 대한 판단을 현상학적으로 정지하고, 타인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서 발견하고 공감하여 ‘우리’로서 연대의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에서 보여준 아이들의 고투(노력)처럼. 신뢰도 끈이다. 끈은 손바닥끼리 마주잡고 비벼 꼬아야 만들어진다. 먼저 내가 두 손바닥을 비비며 신뢰의 끈을 만들어 남도 두 손바닥을 비벼 만든 끈과 연결해 만들어지는 것이 곧 현대적 의미의 생성하는 사회(공동체)다.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자발적 복종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에 머물 뿐이다. 오직 노력의 끈으로 사회의 뿌리를 만들고 생성하는 사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형태는 예측할 수 없다. 층위도 예측할 수 없다. 빅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본원의 사회(공동체)라는 뿌리에서 생성의 사회(공동체)는 무수한 가지와 잎새들로 피어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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