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은 형상이 있으나 흔적이 없고 동학은 형상이 없는 듯하나 흔적이 있다

글: 홍박승진

계간 『다시개벽』의 매년 봄호는 ‘한국 자생적 사유의 흔적’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매년 겨울호의 공통 주제는 ‘서구 이론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인데, 비판은 문제를 똑바로 보자는 것, 지금까지 틀린 질문만 던져오던 것을 그치고 정확한 질문을 새로이 던지자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것,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고 너무 오래 망각된 일이다. 폐허 위에 높고 넓은 새 집을 세우려면 그만큼 깊고 단단한 토대를 쌓아야 한다. 새로운 열매를 얻으려면 씨앗부터 새롭게 돌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다시개벽』은 봄이 올 때마다 이 땅에 널리 흩어진 자생적 사유의 흔적을 주워 모은다.
올해 봄호의 원고는 ‘문화예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모았다. 문화예술은 사회나 학문에서 아직 또렷이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이 은연중 느끼고 있는 바를 민감하고 날렵하게 포착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자생적 사유를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는 아직 비주류의 견해이지만, 자생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느낌은 우리 삶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것이 아닐까. 문화예술은 자생적 사유에의 목마름이라는 시대의 공기를 사회보다도 더 빠르게, 학문보다도 더 또렷이 담아낸 것이 아닐까.
제2호(봄호)의 주제를 ‘문화예술에 나타나는 자생적 사유의 흐름’으로 더욱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예술과 관련된 동학의 사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지난 창간호(겨울호)에서부터 『용담유사』의 한 구절(“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을 활용하여 해당 호의 기획 주제(“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를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동학경전 가운데 의미 깊은 미학이론으로 발전시킬 만한 지점은 ‘형상’과 ‘흔적’에 관한 사유이다.
최제우가 하늘의 도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많은 지식인이 몰려와서 그 하늘의 도가 서양학[洋學]과 어떻게 다른지를 그에게 물었다는 기록이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文)」—처음 제목은 「동학론(東學論)」—에 나온다. 이때 수운은 자신이 말하는 하늘님의 도는 동학이라고 말하며, 동학과 양학의 차이점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은 ‘형상’과 ‘흔적’의 관계로 풀이한다.
우리 도는 인위적인 것이 없는 변화이다. 그 마음을 지키고 그 힘을 바르게 하며, 그 생명을 따르고 그 가르침을 받으면, 변화가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구인은 말을 함에도 앞뒤가 안 맞게 되고 글을 씀에도 옳고 그름이 없게 되며, 머리 숙여 절을 함에도 하늘님을 위할 실마리가 없고 오직 자신만 위하는 꾀를 빌게 되며, 몸을 움직임에도 힘을 변화시키는 신성이 없고 사유를 함에도 하늘님의 가르침이 없으며, 형상이 있으나 흔적이 없다.
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西人 言無次第 書無皂白而, 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최제우, 「논학문」, 『동경대전』, 39쪽. 강조는 인용자).
수운 최제우에 따르면,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근본 작동원리는 ‘무위적인 변화’가 아니라 ‘인위적인 변화’이다. 반면에 동학에서 말하는 도는 ‘무위적인 변화’라고 한다. 서학에 “형상이 있지만 흔적이 없다”고 통찰한 문제의 구절은 수운이 동학의 도를 ‘무위적인 변화’로 설명한 앞부분과의 대비를 통하여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형무적(有形無迹)”은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근본 작동원리인 ‘인위적 변화’의 중요한 예시 중 하나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최제우가 ‘유형무적’을 서학의 한계로 지적하였으므로, ‘형’은 부정적인 개념에 해당하며 ‘적’은 긍정적인 개념에 해당한다고 거칠게 분류할 수도 있다. 조성환에 따르면, 동양 전통 사상사의 맥락에서 ‘흔적’ 또는 ‘자취’는 비본질적이기에 버려야 할 찌꺼기를 뜻하였다고 한다. 그와 달리 동학은 흔적의 없음을 비판한다는 점, 뒤집어 말하면 흔적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동양 사상사의 전통적 맥락을 뒤집는 파격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형무적은 인위적 변화인가? 수운이 그 지점을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근본적인 한계로 비판하는 까닭은 또한 무엇인가? 물론 ‘서양’과 같은 용어에는 서양 내부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역사와 사상들을 일반화할 위험이 있다. 서양에서도 멕시코나 라틴계 민족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원주민과 같은 토착민들의 문화적 전통도 유구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 자체가 지니는 궁극적 한계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제우가 여기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서학(서양적 사유)의 대표로서 염두에 둔 것은 천주교와 같은 기독교였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서학은 천주교 자체를 가리키거나 천주교를 통하여 들어오는 서구 제국주의 문명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며, 그리하여 수운은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핵심에 플라톤주의적-기독교적 사유가 깔려 있음을 통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서구 제국주의 문명이 하늘님을 위하지 않는 기도에 근거한다고 비판한 것은, 플라톤주의적-기독교적 논리가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핵심에 있다는 수운의 통찰뿐만 아니라 플라톤주의적-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그의 급진적 사유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유형무적을 플라톤주의적-기독교와 연관시켜 살피면, 인위적인 변화가 무엇이며 왜 비판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플라톤주의적-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인격신이라는 특징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의 피조물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유일의 절대자라는 특징이다. 흔히 기독교의 신이라고 하면 수염을 기르고 구름 위의 보석으로 치장된 천국에 근엄하게 자리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플라톤주의적-기독교적 사유에서는 신의 인격적이고 천상적인 형상을 제시한다. 이러한 모습의 신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작용이나 삶의 변화를 인위적인 것으로 여기기 쉽다. 현실 속에서 내가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은 인격적인 유일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이는 인위적으로 대상을 조작하거나 통제하는 ‘개인’의 관념을 신에게 투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원죄에 물든 피조물의 세계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은 그 육신의 세계인 지상의 삶을 부정하여 순수 정신의 세계인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부자연스러운 노력이 된다.
이와 달리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은 마음과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힘이며 생명과 생명 속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이다. 하늘님은 지상과 단절된 천국의 존재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지닌 뭇 존재자들의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늘님은 ‘천국의 수염 난 아버지’와 같은 특정한 형상으로 떠올려지기 힘들다. 다만 동학의 하늘님은 우주 생명 활동을 통하여 그 자취를 나타낼 따름이다. 만약 이러한 하늘님을 모시고 섬긴다면 모든 우주 생명의 움직임이 하늘님의 변화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앎에 근거한 진리 또는 사유[學]를 하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최제우는 하늘님이 우주 생명 활동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가리켜서 “하늘님의 창조하고 변화하는 흔적[天主造化之迹]”이라고도 하였다(「布德文」, 『동경대전』, 19쪽). 요컨대 플라톤주의적-기독교의 신은 생명 활동을 절대적으로 초월한 유일의 인격체이기에 형상으로 제시될 수 있지만, 동학의 하늘님은 생명이 변화하고 창조하는 원리이자 힘 자체이므로 초월적 인격신의 형상으로 제시되기 힘들며 다만 생명 활동이라는 흔적 속에 언제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문제는 신 또는 하늘님이라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가치를 마음과 생명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외부에서 찾고자 한다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서학에 대한 수운의 진단이다. 최제우는 서구인이 일부러 앞뒤가 맞지 않거나 옳고 그름이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신성은 항상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그런 줄을 모른 채로 우리 바깥에 신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논리는 그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최제우의 진단은 서구 제국주의 문명에서의 생활 방식이 의도적으로 하늘님을 위하지 않는다거나 공공연하게 자신만을 위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밖의 하늘님에게 조아리고 절을 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하늘님을 위하는 일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늘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하늘님에 투사된 자신의 인격만을 위하는 일일 수 있다[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그러다보면 모든 생명체들의 신체적 움직임이 곧 신성의 변화하는 힘인 줄을 모를 것이며, 마음과 생명 안에서 어떠한 사유와 진리가 우러나와도 그것을 하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서학에는 형상이 있고 흔적이 없다’는 말은, 플라톤주의적-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우리를 초월한 신의 형상을 찾느라고 정작 이 땅에 늘 생생히 나타나고 있는 하늘님의 흔적은 모르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서학은 신의 형상을 말하느라 신의 흔적을 말하기 어렵지만, 동학은 우주 생명 활동이 하늘님의 흔적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형상에 관한 동학의 사유는 어떠한가? 동학에서는 ‘하늘님은 형상이 없다’고 단정 짓는 대신에 ‘하늘님은 형상이 없는 듯하다’고 표현한다. ‘동학’의 본질을 논의하는 수운의 텍스트 「논학문」은 “무릇 하늘의 길은 형상이 없는 듯하나 흔적이 있다[天道者 如無形而有迹]”는 구절로 시작한다(「논학문」, 33쪽). ‘형상이 없다’와 ‘형상이 없는 듯하다’의 차이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중요한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만일 하늘님은 흔적이 있으나 형상이 없다고 단정을 짓는다면, 감각적인 차원에서 하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끊어질 위험이 있다. 이는 오직 하늘님의 흔적만을 감각할 수 있을 뿐, 하늘님의 실제 형상을 감각할 수는 없다는 논리가 된다.
서구 철학은 형상만이 실재이며 흔적은 거짓 존재라고 간주하거나(플라톤주의), 아니면 그 이분법을 물구나무 세워서 흔적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형상은 그 흔적을 다듬어 만들어낸 것이라고 여긴다(해체주의). 이와 달리 동학의 형상/흔적 개념은 하늘님의 형상을 감각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되 흔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다소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주 생명 활동은 창조적 힘으로서의 하늘님이 만물을 표현하는 것, 즉 하늘님의 흔적이다. 모든 생명은 이미 하늘님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 바깥에서 하늘님의 형상을 찾고자 하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생명 활동 전체가 하늘님의 흔적임을 알고 받아들이면 곧 하늘님의 형상을 감각한 것과 같다.
하늘님의 형상을 감각할 수는 없는 듯하지만 감각할 수 있다는 말은 하늘님의 형상을 감각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다는 뜻까지 담고 있다. 우주 생명 활동은 언제나 창조하고 변화하는 힘의 흔적이지만, 그 힘이 하늘님임을 알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서구의 니체주의(데리다나 들뢰즈 등의 철학)는 세계 전체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힘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동학의 사유와 상통한다. 다만 동학은 세계의 원천인 그 힘을 하늘님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점이 서구 현대철학과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우주 생명 활동이 하늘님의 흔적임을 알지 못하면, 우주 생명 활동을 창조와 변화로 감각할 수는 있어도 하늘님의 창조와 변화로 감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성과 신성의 차원을 배제하려는 서구 현대철학의 경향과 달리, 동학은 생성의 힘을 영적이고 신적인 것으로 사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물질/영혼 이분법’ 또는 ‘피조물/신 이분법’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동학은 물질과 생명의 창조하고 변화하는 힘이 곧 신성한 영혼[神靈]인 하늘님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동학의 형상/흔적 개념은 수운과 해월의 “감각되지만 감각하지 못한다[視之不見 聽之不聞]”는 사유 등과 관련하여 더 복잡하고 방대한 검토를 요구하는 주제이지만, 이 글에 맞게 지금까지의 논의를 갈무리하여 한국 예술론의 문제로 돌아가야 하겠다. 한국의 고유하고 자생적인 예술론 자체가 ‘형상이 있는 듯하지만 흔적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예술론은 지금까지도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매순간 우리 삶 속에 생생한 ‘흔적’으로서 분명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번 『다시개벽』 제2호(봄호)에서 증명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노예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술이창작(述而創作)’의 창조적 사유를 모색하는 〈다시쓰다〉 꼭지에는 유상근, 유신지, 정우경, 임동확, 김동민의 글을 담았다. 유상근의 글은 사이언스픽션 속의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이라는 뜨거운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인이 동양의 미래를 대신 상상할 때의 근본적 한계를 날카롭게 논파하며 동양인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유신지의 글은 2000년 이후부터 한국 현대문학을 동학과 같은 한국 고유의 자생사상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이 본격적으로 제출되고 있는 현황을 검토함으로써, ‘개벽문학’의 방법론이 한국문학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열 것이라고 전망한다. 정우경의 글은 남성 작가이자 사회주의 작가였던 김남천이 (작가의 이념이 작품의 서사를 장악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문학론과 달리) 여성의 고통을 작품 속에 오롯이 재현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실패의 과정 자체가 나 아닌 존재들에게 가 닿으려는 노력이었던 김남천 소설의 자생적 평등주의는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는 외래적-고정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본다. 이호재의 글은 한국 고유사상이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각 종교의 특성은 어떠한 속성의 신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한국 고유사상의 특성을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자생종교 특유의 신관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임동확의 글은 특수성과 보편성의 이분법, 개체성과 전체성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자리에 동학사상의 고유성이 빛나고 있으며, 그 고유성을 시적으로 구현한 자리에 김소월의 시 「산유화」가 빛나고 있음을 통찰한다. 이번 호부터 총4회에 걸쳐 연재될 김동민의 글은 대중문화 이론의 개벽 선언으로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학제 간 통섭이 개벽의 중요한 정신 중 하나임을 밝힌다.
〈다시읽다〉 꼭지에는 홍박승진, 이우진, 최범의 글이 있다. 홍박승진의 글은 다시개벽의 역사철학이 내재적 신성에의 앎이라는 척도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백낙청 식의 직선적 역사철학과 김종철 식의 순환적 역사철학을 포월한다고 주장한다. 이우진의 글은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연구가 한국의 토착적 정신문화를 주체적으로 재발견하는 개벽의 상상이었다고 본다. 이 글은 신채호의 역사학에서 실증적 엄밀성보다도 상상력의 가치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다소 도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시개벽』은 논란 없는 통념의 편이 아니라 문제적인 새로움의 편에 서고자 한다. 최범의 글은 안상수의 디자인이 한국 현대디자인에서 거의 유일하게 담론을 갖춘 조형이자 원본성(독창성)을 갖춘 조형인 까닭을 탐문하는데, 우리는 그 물음 속에서 자생적 담론이 곧 원본성과 이어진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다시말하다〉 꼭지에서는 디자이너 안상수와의 대담을 마련함으로써, 다시개벽이 과거만도 미래만도 아니라 이미 현재라는 소식을 듣고자 하였다.
이번 호부터 새로 마련한 〈다시그리다〉 꼭지에는 차도하, 성다영, 김승일 시인의 시 작품을 모셨다. 백 년 전의 『개벽』지는 독보적인 사상잡지였을 뿐만 아니라 독보적인 문학잡지이기도 하였다. 나혜석의 미술, 김명순과 김소월의 시와 소설, 김기진의 비평 등, 개벽사상과 모종의 연관성을 이루면서도 예술적 파문을 일으킨 문화의 창조가 그곳에서 약동하였다. 『개벽』의 정신을 다시 잇는 『다시개벽』이라면 그와 같은 지점까지도 다시 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다’라는 낱말은 ‘감각을 나타내다’, ‘사유를 표현하다’, ‘상상하거나 회상하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에는 시 작품만을 실었지만, 갈수록 더욱 폭넓은 문화예술 창작의 장을 열고자 한다. 〈다시그리다〉를 통하여 매개하고자 하는 한국문학이 그와 같은 의미들의 복합체이기를 희망한다.
현재적이고 문제적인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날 한국인의 언어 속에 소환하는 〈다시잇다〉 꼭지에는 혜강 최한기의 저서 『지구전요』의 서문, 그리고 『개벽』 제5호(1920.11)에 실린 야뢰 이돈화의 글 「외래 사상의 흡수와 소화력의 여하」를 소개하였다. 앞의 글은 김봉곤이, 뒤의 글은 김현숙이 번역하였다. 『지구전요』는 한국사상 중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지구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꼽힐 만하다. 야뢰의 글은 외래 사상을 섭취하면서 그것에 거꾸로 잡아먹히는 것은 결국 소화력 부족의 문제이며, 한국사상의 주체적 소화력이 튼튼하기만 하다면 외래 사상을 많이 섭취할수록 오히려 자기의 성장에 유익하다는 호방한 사유를 전개한다.
〈다시열다〉 꼭지는 창간호에 있었으나 이번 호에서 쉰다. 한국 자생적 사유의 새로운 세대를 길러내고 키우자는 것이 〈다시열다〉의 목표인데, 그 목표에 부합하는 고민과 노력이 부족하였다. 앞으로 〈다시열다〉는 비성인(非成人) 필자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창조한 다시개벽적 사유를 모아서 싣는 자리가 될 것이다. 성인의 굳은 머리와 심장에 충격을 던지는 글을 망설임 없이 보내주기 바란다.
다음 호인 제3호(여름호)의 주제는 ‘지구인문학과 탈인간중심주의’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그동안 인간이 지구에게 저지른 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에 홍대용, 최한기, 동학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자생적 지구인문학을 살피고, 서구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 철학, 그중에서도 포스트휴먼 페미니즘 철학을 다룰 것이다. 이에 관하여 깊이 고민하는 독자의 많은 투고를 기다리겠다.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