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그리고 동학의 신간

글: 박길수

우리 역사에서 ‘황금기’로 손꼽히는 조선 세종 시대. 그 시기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인 각종 과학 부문(특히 천문 관측과 역법)의 발달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이를 진두지휘한 세종대왕과 이를 실무적으로 이끈 사람 중의 한 명인 실존인물 장영실을 두 주인공으로 하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내가 보기로는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닌 내가 굳이 이 영화를 보려고 했던 까닭은 영화의 모티프가 된 것이 ‘시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시간과 하늘을 만들고자 했던”이라는 영화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이,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조선의 시간과 하늘’을 ‘만드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영화 속에는 의미있고 재미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이 영화를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로 보면,
<천문>에서 정확한 ‘시간’(절기)을 아는 일은 적절한 파종 시기를 정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하늘의 운행’을 관측해야 하는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내에 편입되어 있던 당시 조선, 더욱이 나라의 중추를 이루는 사대부들이 ‘사대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당시의 풍토에서, ‘오직 황제의 권한’인 ‘천문 관측’을 필수요건으로 하는 ‘조선의 시간 찾기’는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가와 민중(민족)의 안위보다는 기득권 수호와 공허한 명분(事大)에 집착한 일부 대신들의 농간으로 세종과 장영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영화의 절정(climax)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적절한 역사적 상상력과 실제의 역사기록(fact)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흥미진진한 설정과 장면들이 연속된다.
영화에서는 ‘조선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실제 역사기록에서 장영실이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인상을 풍기지만, 영화를 보는 내 상상력은 그것을 따라가기보다는 여전히 ‘조선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라는 물음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영화에서 천문 연구와 ‘조선의 시간’ 만들기가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한글 창제’와 관련이 된다. 영화 속에는 세종의 견제세력(사대적인 重臣)이 명나라를 등에 업고 ‘조선의 시간’이냐 ‘한글’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모양으로 그려지지만, 내가 보기에 ‘조선의 시간’과 ‘한글’은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탱하는 버팀목 같은 것이어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All or nothing)”의 문제라는 것은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 하늘과 땅을 걸고 벌이는 승부 또는 하늘과 땅을 뒤집는 승부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종과 장영실(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의 학사들)은 조선시대의 ‘개벽파’의 효시라고 할 법하다. 근대의 개벽파가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 ‘비서구적 근대’나 ‘영성적 근대’를 그 외적인 특성으로 나타낸다고 평가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세종 등의 삶은 전형적인 개벽파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시간’과 ‘조선의 말글(한글)’은 ‘개벽의 시간’이자 ‘개벽의 말글’과 관련된다. 일찍이 『천도교회월보』의 창간동인이면서 3.1운동 직후 공석이 된 발행인 자리에서 월보 발행을 이끌었던 유재풍(柳載豊, 1867~?)은 “조선에서 독창적으로 발생한 두 가지 큰 물건”으로 ‘한글’과 ‘동학’을 손꼽았다(천도교회월보, 제129호, 1921년 5월호). 유재풍은 한 민족의 고유한 언어는 그 민족의 ‘자연적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며 특히 한글은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은즉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는 믿음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배우기도 쉽고 쓰기도 편리하여, 사람의 생각과 뜻을 소리로 발표하고 글로 기록함에 말과 글의 일치한 정신이 역사의 참 면목과 습관의 실상 뜻을 가히 증거하겠도다.”라고 하였다.
영화 <천문>에서 세종이 ‘조선의 시간’을 찾고 만들겠다는 뜻을 품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중국 중심의 ‘절기’가 한반도의 기후 절기와는 맞지 않음으로 해서 민중(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생활을 하는 데에 크나큰 불편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글 창제의 목적도 “백성들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제대로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영화 <천문>에서 “하늘을 관측하고 시간을 선포하는 일은 ‘(중국) 황제’의 일”이라거나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사대부(양반)’들의 ‘밥그릇’”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조선의 시간’과 ‘조선의 말글’을 만드는 일은 과거의 인습으로부터 탈피하고 기득권과 압제로부터 독립하는 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유재풍이 한글과 동학을 ‘조선에서 독창적으로 발생한 두 가지 큰 물건’으로 손꼽은 것은 그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 밝히는 바에 따르면 그 두 물건은 조선에서 발생하였지만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이고 또 그것이 품고 있는 뜻이나 그것이 내비치는 밝은 이치가 세계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계에 비추어 스스로를 보고, 또 세계(인류)에 얼마나 이바지[寄與補裨]하는지를 되물어서, 그 최종 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 글이 발표되기 2년 전에 있었던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문’에서 우리 한민족의 독립은 지구촌의 세계평화 시대, 인류의 정의인도 시대를 위한 초석이 된다고 선언한 혜안과 통찰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되 우리 안에 갇히지 않고 ‘전체’ 속에서 그것을 자리매김하는 마음과 시선이다. 이것은 또한 개벽파의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한글 창제의 주체들이 직접 밝힌바(정인지의 <訓民正音 序>)에 따르면 한글(모음)은 천(•) 지(ㅡ) 인(ㅣ) 삼재(三才)를 기본 구성 원리로 하여 창제되었다(자음은 인체=발음기관). ‘천지인’ 삼재는 만물과 인생(人生)을 설명하는 근본 이치이기도 하다. 이때 하늘과 땅과 사람은 조선의 하늘, 조선의 땅, 조선 사람이면서 이 우주의 몸과 마음과 영성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에 이르러서, 한글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 미래 가치(4차산업혁명 시대의 세계 언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가고 있다.
유재풍이 주목한 ‘한글’과 ‘동학’의 또 하나의 유사성은 그것이 창제(창도)된 직후 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회의 기득권자들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또 그로 인하여 온전히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익히 아는 대로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한글이 ‘언문(諺文)’이나 ‘안방글’로서 천대를 받아서 제 값어치를 충분히 하지 못하였고, 동학이 오랫동안 금지의 대상이 되고 그 여파로 두 분 스승(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이 ‘참혹한 변을 당하였던 사실’(참형과 교수형으로 순도)이 그 증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내 것’보다 ‘남의 것’을 귀히 여기고, 또 나아가 ‘남의 것’(한자나 외래 사상, 외래 문물)을 드높이고자 제 것을 멸시하는 태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도 공통된다고 하였다. 근대 이후 한글이나 동학을 드높이는 관심과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서구적) 근대화의 파도는 그러한 관심과 노력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크고 강력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글이 오늘날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동학이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지 않고 꾸준히 전환과 성숙(수양)의 뿌리와 샘물이 되고 있음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위안에 안주하기에는 한글이나 동학이 놓여 있는 시간과 공간은 엄혹하다는 점도 또한 사실이다.
동학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묻는 사람의 의도와 답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다. 오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이 물음에 답한다면, 동학은 “개벽의 시간의 선언”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간, 전근대(비서구)에서 근대(서구)로 흐르는 시간, 정신에서 물질로 흐르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다시 개벽’하여 희미해지는 ‘한울님 마음’을 되살리고, 만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귀일체의 세상을 잊지 아니하며, 창조적인 순환을 거듭하는 것이 개벽의 시간이다. 시간의 개벽은 존재(공간)의 개벽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우리가 지나는 시간(공간)은 바로 그쯤이다. ‘개벽의 시간’의 결대로 살아가는 것이 ‘개벽하는 삶’이고 그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무궁한 시간(무궁한 이 울) 속에서 무궁한 존재(무궁한 나)로서의 나의 실상을 자각하고 무궁히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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