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구합니다, 다시 고비원주(高飛遠走)하기 위하여

-개벽, 개벽파, 개벽신문의 장래에 대하여 소통하다

글: 박길수

정리/편집: 박길수

[필자 주] 이 글은 2019년 10월 30일에 페북에 올린 ‘공개질의’에 응답해 주신 분들의 댓글을 포함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공개질의’와 ‘댓글’ 모두 필자가 각 필자의 의도를 감안하여 임의로 편집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1. 묻습니다, 지혜를 구합니다

『개벽파선언』(조성환, 이병한 지음)을 내놓고, 새삼스럽게 ‘개벽’이라는 말에 대한 저항감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여러 가지 분석을 시도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개벽’이라는 말은 6070 취향의 용어이다. 2030은 물론이고 4050조차도 흔쾌하게 반응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이르렀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개벽’이라는 말이 최근에 성행한 특정종교의 비일상적인 교리와 비일상적인 포교 방식을 떠올리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야기하였던 그 특정종교와의 연관성이 짙은 그림자(선입견)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선입견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개벽(開闢)’이 현대인에게는 낯선 한자어로서 겨우 ‘천지개벽’의 의미로 다가간다는 점, 그래서 오늘의 첨단과학시대에 왠지 뒤떨어지고, 낡은 느낌으로 다가간다는 점도 확인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마음가짐으로, “‘개벽’을 버려야 ‘개벽’이 산다”거나 “개벽을 개벽하자”는 이야기까지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개벽파선언』이나 <개벽신문>이 핵심 근거로 삼고 있는 동학의 개벽사상이 160년 전에 선포되고, 해월과 의암으로 이어져 오며 심화 확장을 거듭하였으며, 또 동학이 내세우는 이상향의 비전이 후천개벽이라는 점은 접어두고라도, 100년 전 창간된 『개벽』지의 복원을 꿈꾸며, 30년 전 <주간개벽>의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개벽신문>을 10년 가까이 발행해 오고 있는 나 개인으로서는 ‘개벽’에 대한 이러한 저항감 또는 개벽을 낯설어 하고, 거부감마저 갖는 이 상황이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4, 5년 전 이미 <개벽신문>의 제호변경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한 차례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는 했습니다. 그때에도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문제가 잠복된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긁어서 부스럼을 일으킨 이러한 현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 (1) ‘개벽’이라는 말 자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것인지, (2) ‘개벽’을 둘러싼 주체(개벽파, 개벽신문 편집위원, 개벽하는 사람들 등)들의 나태함, 즉 개벽의 의의를 충분히 잘 설명하지 못하였고, 또 체감할 수 있는 실증적 사례를 생활 속에서 구현해 보이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 (3) 특히 최근 들어 급격하게 사회흐름의 주요 변수로 떠오른 ‘세대 단절’ 문제로 볼 것인지, (4) 양자시대로 진입한 현대사회의 체제나 분위기의 효박함 때문인지(결국 이런 점들이 복합된 것이겠지만) 깊은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5) 그동안 동굴 속에 처박힌 채, 몇몇 사람(교단 포함)들의 전유물로 운위되던 ‘개벽’ 담론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햇빛과 바람과 비와 이슬을 쬐기 시작한 단계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리하여, 묻습니다. 지금 개벽이 처한 이러한 고민을 순조롭게 극복하고 개벽의 열매를 누구나 맛있게 먹고 마시며 내 생명과 생존과 생활을 행복하고 풍요롭고 정의롭게 하는 철학, 사상이 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지혜를 구합니다.

2. “문명의 대전환, 혁명을 넘어 개벽으로”

[유정길]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의 운명 같은 느낌이군요. 국가주의를 반대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생태주의자나 협동조합주의는 대개가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하는데,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쓰는 순간, 다소 그 이미지에 갇혀 버리는 상황이라고 할까. 그러다 보니, ‘아나키스트’나 ‘아니키즘’은 점점 대중들로부터 멀어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지요. 그러나 바른 길이라면,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오래 사용하고 실천하여 용어의 이미지를 바꿔야지요.
[강주영] 저는 “‘개벽’ 담론이 세상 밖으로 나와 햇빛과 바람과 비와 이슬을 쬐기 시작한 단계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서구적 생각이 너무나 짙어요. 마르크스주의자들하고 『개벽파선언』을 두고 토론했는데, 뜨악해합니다. 책을 사서 보지는 않지만, 관심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현재 개벽파 담론은 우선 어려워요. 익숙한 글이 아니라 깨달아 새겨야 하는 문장이 많은 것도 한 요인입니다. 좀더 대중적인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그 점을 새기고 있습니다. 동학을 한 번 이라도 고심한 이들은 알아들으나, 그렇지 않으면 ‘인내천’을 ‘예수의 사랑’과 동일시합니다. 사랑은 겪은 사람만이 알지요. 논리어가 아니라 영성어(靈性語), 깨달은 언어이지요. 풍우상설이야, 늘 있는 법이지만, 어느 날 문득 일시화발만세춘(一世花發萬勢春)할 것입니다.
[이병철] 나도 용어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지금은 그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죠. 개벽의 담론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팎의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내용임을 제시한다면 아마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싶어요. 단순한 체제의 변화 또는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이 용어가 갖는 독특함을 살릴 수도 있지 않겠나 싶군요. 이를테면, “문명의 대전환, 혁명을 넘어 개벽으로”와 같은 구호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지 않겠나 싶군요. 근본적인 문제는 『개벽파선언』에서도 시대의 고민을 해결할 실천적 내용이 없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철] 아직도 문화와 사상의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제와 미제의 문화에 세뇌되어 있기에, ‘개벽’에 대한 저항감이나 외면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요. ‘민중신학(民衆神學)’이 나왔을 때의 저항감 같은 것이 현재의 ‘개벽’이라는 말에 있는 것 같아요. 민중신학을 초기에는 낯설어했지만, 민중신학자들과 그에 감화된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당시의 사회변혁운동에 공동주체나 연대주체로 나서면서 그런 저항감과 낯설음이 없어졌지요. 개벽운동도 아직은 사상-이론-방법 세 차원에서 볼 때 이론과 방법에서 취야한 것 같습니다. 하니, 여타운동들(이론과 실천 양면)과 공동주체와 연대주체로 활동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접민주주의 민회마을 공화국운동, 시민정치, 기본소득제, 그린뉴딜, 민생대혁신운동 등 구체적인 개벽운동들과 함께해 나가다 보면 혁신 종교권의 용어로 치부되던 개벽이란 고유명사가 보편명사로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이찬수] 일본에서 다음 달 조성환 박사 강연을 기대하는 사람을 만났어요. ‘개벽학(開闢學)’을 일본에서 먼저 알리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어요. 다른 나라에서 먼저 예수 사상이 환영받았지요.
[이남희] 개벽 혹은 후천개벽, 대중들에겐 아무래도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어휘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개벽의 개념을 고스란히 담아 낼, 대체할 만한 적절한 다른 단어가 없다면, 개벽이 대중의 귀에 익숙해지고 그 뜻도 분명해지도록 계속 개벽, 개벽, 개벽을 말해야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무열] ‘라이프 스타일 민주주의’란 말을 몇몇 이들과 쓴 적이 있습니다. ‘생활 속 민주주의’란 뜻을 담아 쓴 말이었죠. 의미가 지금의 형식에 서로 어울리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조금 더 가볍고 발랄해졌으면 어떨까요? 벽청(闢靑: 개벽하는 청년들)들처럼.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하지요.
[이광재] (1) 언어의 역사성 문제가 있습니다. 언어는 변화하지만 그 변화는 내 얼굴이 늙어가는 걸 분초 단위로 확인하는 게 아니듯 매순간 확인되는 게 아니죠. 꽤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변화를 확인하게 되는 게 대부분이죠. 그건 당대의 언어뿐 아니라 그 언어를 담는 그릇, 더 크게는 패러다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개벽이란 말은 문자 상으론 한자지만 중국적이기보단 한국적 사상의 응결입니다. 이른바 토착사상이죠. 그런데 이 토착이란 건 일제, 이승만, 박정희 유신을 거치는 동안 미신이란 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자본의 탐욕적 거식증(서양 귀신이죠)이 전 세계 어느 곳보다 토착을 강력하게 무너뜨린 지금-여기 한반도의 21세기에, 개벽이란 이미 용도 폐기된 미신과 다름없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용례는 이미 토착적이지도 않고,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리스의 상인들 논법입니다. 미신과 동일시되는 토착사상 개벽을 그리스 장바닥 용어로 기술하는 것은 상투 틀고 양복 입는 것과 흡사합니다. 내용은 매우 토착적, 영적인데 언어 용법은 그걸 다루기엔 뭔가 적합지 않은 서구 근대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지요.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이 정보화 시대에 대체 무슨 그런 낡아빠진 소릴 하고 있대?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구요. (2) 이 철지난 미신적 언어가 사실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고 한다면 차분히 말해야 합니다. 서구적 언어 혁명과 개벽의 차이를 잘 설명해야 합니다. (혁명도 식상한 마당이니 오죽 잘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유리그릇 다루듯 설명해야죠. 이를테면 우리는 나라 생긴 걸 개천(開天)이라 해서 개천절을 기념하죠. 거기 빗대어 개벽은 단순한 전복과 권력 주체의 변경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열어젖힘을 설명해야죠. 하지만 그 과정을 생략하고 선언해 버렸죠. 개벽이라고…. 개벽파라고. 거기에 대한 반응은 ‘뭐래? 꼰대처럼 쯧쯧.’입니다. 실제 내용은 꼰대가 아닌데, 하는 짓은 꼰대 짓입니다. 왜 그럴까요? (3) 서둘러 개념적 명명(命名)을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개벽은 그나마 100여 년을 견딘 용어니까 그렇다 치지만 벽청(闢靑)이라니요. 뜨악합니다. 언어가 그렇게 공학적으로만 기획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과정 건너뛰고 성급하게 개념들의 연속적 확장으로 진행하는 이유는 담론의 주체가 한정되어, 그쪽 공부를 한 사람끼리만 골방에서 논의하듯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끼리는 다 아는데 못 알아듣는 사람이 야속하거나 끊임없는 계몽 대상일 뿐이죠. 그건 심각한 착각이고 조급증입니다. 자기 당대에 자기 손으로 이룩하려는 조급성, 이건 역사비관주의이자 레닌 식으로 말하자면 ‘소영웅주의’입니다. 그리하여 발 딛고 있는 실제의 땅이 아니라 본인의 체계로 실재적 역사 현상마저 꿰맞추려는 오만과 독선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자폐적이 되지요. 맙소사, 홍석현도 개벽파라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미독립선언문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니요. 별 설명도 없이. 제 고교 시절 교련 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이 최고의 글이라던데…. (4) 동학을 포함해 토착사상을 종교라는 어떤 종교 규범 속에 묶어둠으로써 이 거대종교가 춤추는 세상에서는 접근을 차단당하게 되는 점도 있어 보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어떻게 미래의 꿈인 사상으로 자기 목소리를 갖게 할 것인지 고민합시다. (5) 사상도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시가 있습니다. 어느 감정, 어느 영적 지점을 친 거죠. 그러니 감동이 있고 스며오는 겁니다. 선언이라는 다소 오만하고 계몽하려는 듯한 일갈도 필요하지만 스며드는 과정이 진정 중요하다 봅니다. 따라서 이 성실하고 열정에 찬 탐구가 문학 혹은 여타의 것들과 병진해야 할 거라 봅니다(그중 문학이 문자매체라 중요합니다). 뼈만 있으면 좀비나 미라인 거고, 살과 피가 입혀져야 인간의 숨결로 고비원주하게 되지 않을까요?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소나무니까요. 아우, 지치네요.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요.
[강주영] 『개벽파선언』은 뜨악한 곳이 있습니다. ‘근대’가 실패한 것임을 우리 실정에 비추어 드러내야 하는데 다만 서구의 황혼이라 선언하고 그 대체제로 곧장 ‘개벽’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막상 서구의 황혼에 동의하지도 않을뿐더러 아시아의 일어섬도 자본제의 경제적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성장시대의 신화에 사로잡혀 (부르주아)민주 정도로 만족합니다. 물론 사회주의도 있는데, 이들은 계급투쟁이라는 주체가 명확한데 개벽은 그 주체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도덕운동처럼 들리는 거죠. 더욱이 서구의 황혼이라 진단하면서도 서구적 성장은 예찬하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해 너무 낙관적입니다(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도 그 유효함이 있다고 보는데, 일방적으로 아니라고 밀어붙이는 것 같습니다. 통으로 무시당하는 느낌입니다. 개벽이 구체성을 얻으려면 주체와 방향이 명확해야 합니다. 경인-경천-경물의 개념어를 들이댄다고 설득되는 것은 아니죠. 3.1운동과 천도교청우당 의 계보적 연결도 어디인가 네 논에 물대기는 아닌지. 신선함이 있는데 종파적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선언’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받아줄 진지(陳地)가 있을 때 나오는 것인데,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느낌마저 있는 것이죠. 저는 열렬히 환호하지만 이것을 대중화하는 건 다른 차원입니다. 학문적 철학적 태도가 곧바로 현실적 실천 담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벽파는 더 무시당할 것입니다. 개벽파를 논의 테이블에 올리면 이는 개벽파의 성장을 돕는 것인데 서구적 학계와 서구적 진보 논객이 논의 주제로 삼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니 개벽파는 그 논지를, 예를 들면 최근의 조국 사태에 적용하여 진단하고 길을 제시하는 방식의 글쓰기가 있어야 합니다. 부탄이나 쿠바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개벽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죠. 6하 원칙을 가진 강령적 글쓰기가 있어야 대중을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아직은 소수의 세계에서 더 논의할 때입니다. 그리고 밑바닥이 뜨끈할 때 선언문이 터져야 합니다. 이렇게 논의되고 이 계기로 서로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성공입니다.
[유상용] 학자의 입장에서 개벽파를 정립하는 것과 종교가의 자리에서 개벽을 설파하는 것과 저 같은 실제가의 감각에서 개벽을 조망하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개벽파선언’의 가치는 가라앉아 가던 개벽론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신이 충분히 차려진 상태는 아니겠지요. 개벽은 당연히 ‘ㅇㅇ파’라는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광대한 것이지만 우선은 뜻을 세우기 위해 그 표현을 쓰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강주영 선생의 얘기처럼 선언과 운동은 주체와 실천 방향, 강령이 있은 후에야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 가지는, 마땅히 이루어질 만한 일이라면 사람이 조급하게 끌고 가려하지 않고 천지의 뜻을 헤아리고 모시고 사람의 길을 묻고 함께 해 가는 개벽스러운 변화의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개벽 흐름을 모으기 위해서는, 지금도 일부 하고 계시겠지만, 근대 이후 150년 과정 속, 동학, 증산, 원불교, 공산, 사회, 과학, 공동체 등의 사상과 실천을 개벽의 큰 물줄기로 포용하고 자격을 얻게 하고 동귀일체 하게 하는 ‘대개벽’의 품을 열어 드려야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청년시절 방황과 뿌리 찾기의 모색에서 찾아낸 ‘개벽’을 화두로, 저 나름대로 개벽을 놓치지 않으면서 원불교공동체, 애미서리, 야마기시, 스즈카를 거쳐 30년간 개벽 사회의 실현을 모색해 온 것 같습니다. 학자, 종교 영성가, 실제가, 그리고 세대 간에 융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다음의 발걸음을 함께해 가시지요. 개벽은 고립이 아닌 개방, 개방, 개방으로 가야 살 것입니다. 실제가들도 좀 더 이어지고 선언에 화답해 가야겠습니다.
[김식] ‘개벽’이라는 말에 대해 그 의미를 떠나 한문투 말이라는 점이 거부감을 일으키는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고민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좋은 결실이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Dan Kim] 이 논의와 마음들을 조금 더 정리해서 어딘가 모아두면 좋겠네요.
[강길모]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2인 삼각이나 허들이 있는 경주로 보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졌던 말을 되살리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시대정신으로 보면, 개화 좌우파는 쇠퇴기가 분명하다고 봅니다. 외재적 초월이 아닌 내재적 초월, 계몽을 넘어선 우리의 몸짓으로 정진한다면 길이 넓어질 거라고 봅니다. 시대 언어로, 몸짓 언어로, 한 걸음씩 어깨동무하며….

3. “개벽” – 민들레 홀씨

‘개벽’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게 어떠냐 하는 건, 이와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받는 질문이다. 며칠 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독서토론 모임에서도 몇몇 참가자가 ‘강력하게(?)’ 새 시대의 언어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이 자리에서 발제를 맡은 이선근 님은 ‘개벽을 개벽한다’는, 필자도 썼던 언어를 (사전 공감 없이 동시적으로, 약간은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쓰기도 했다(이 발제문은 본보 00쪽 참조). 그 자리에서 필자는 오늘 ‘개벽’이라는 말이 놓인 자리는 사방을 둘러 아득한 시멘트 바닥인 광장(개화파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자란 ‘민들레’ 같은 신세라고 비유해서 표현했다. 그 민들레를 뽑아 버리고 완벽한 시멘트 광장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 민들레가 씨앗을 퍼트려 시멘트 곳곳에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 사람과 만물이 더불어 만개하는 생명의 광장으로 만들어가기를 꿈꾸는 일이, 현재 ‘개벽’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고난의 행군을 말해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반드시 ‘개벽’이라는 말을 고수하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길임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그 자리에서도 그렇게 밝혔다). 생각건대, ‘개벽’이라는 말을 버려서 ‘개벽’이 이루어진다면, ‘개벽’이라는 말이 무에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말과 행동은 한결같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기면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의 지위, 즉 개벽의 세상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水]이 세상을 낳고 세상이 다시 물을 낳듯이, 기운이 이치를 낳고 이치가 기운을 낳듯이, 말과 세상은 서로를 낳는 거울이다(=세상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개벽을 살고, 개벽을 살리고, 개벽을 개벽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겠다(앞에서 말씀해 주신 여러 의견들도 이 점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공명한다고 생각된다).
‘개벽’과 ‘개벽파선언’과 ‘개벽신문’을 살려나가는 길은 이 세상을 개벽하는 일과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이 ‘문득’ ‘개벽의 징후’를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는 날 ‘개벽’이라는 말은 비로소 정당한 좌표와 신분을 획득할 것이요, 그 좌표와 신분을 획득하기 위한(여성의 참정권 운동처럼, 만물의 법률적 지위 공인운동처럼) 노력을 쉼 없이 해 가는 노력이 세상의 개벽을 개벽하고 징후를 현실로 실현하는 기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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