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새 _ 최예은

글: 최예은

호택은 도저히 진전하지 않는 앞 차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애꿎은 라디오의 볼륨만 올리고 내리는 것을 반복한다. 라디오에서는 김지윤1의 오후 방송이 들렸고, 창 밖에서 떠나지 않는 고즈넉한 시계탑의 뒤쪽으로는 하늘색과 주황색이라는, 언뜻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빛깔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제철을 갓 맞은 거대한 과일처럼 노랗게 익어 가는 하늘에 붙은 먼지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 종일 수십 마리 정도는 보았던 병든 동물의 터럭이 주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호택은 잠시 눈에 띌 수도 있을 만큼의 재채기를 내뱉는다. 모두가 목 놓아 기다린다는 토요일 오후였지만, 호택의 일상에는 쉼표가 없다. 퇴근길에서마저, 빽빽하게 붙은 차들이 경사 진 오르막길에 온음표로 가득한 악보를 그릴 뿐이다.

하, 하고 호택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는다. 담배는 입에 대 본 적도 없던 호택이었건만, 가슴 한 켠에 니코틴과 타르가 얹힌 만큼의 시름이 그 날숨 한 번에 모두 새어 나올 것 같다. 복대동에 있는 집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이 꽤나 걸리는데, 협주곡의 느린 도입부와 같은 도로 사정은 좀처럼 다음 마디로 넘어 가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앞차를 따라 더디게 어기적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오른발과, 당분간 달라질 수는 없을 것 같은 정면 풍경만 번갈아 바라보던 호택의 귀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따르릉- 따르릉-

멋없이 평범한 시선을 잠시 오른쪽으로 돌려 모니터에 적힌 ‘아내’라는 글씨를 본 호택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하나씩 버튼을 조작한다. 아무리 해도 능숙해질 것 같지는 않은 일이지만, 한때는 운전하면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는 것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며 호택은 괜히 어깨만 으쓱해 본다. 여전히 거북 같은 걸음으로 기어 가는 앞 자동차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호택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내뱉는다.

“어, 왜?”
“여보, 지금 퇴근하지? 오는데 얼마 정도 걸려?”
“시계탑에서부터 차가 막혀서 2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연지는? 집에 왔고?”

이 말을 끝내고, 호택은 잠시 전화를 받는 모니터 옆 쪽에 스카치 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가족 사진을 슬쩍 바라본다. 일터에서는 늘상 더러워지게 마련인 흰색 가운을 입은 호택과 옆에서 세상 자애로운 미소를 걸친 아내 은숙 사이에 있는 딸 연지는, 더 이상 사진 속의 회색 교복을 입고 있지 않는다. 회색 시계탑을 지나고, 플라타너스 수십 그루가 양 옆으로 우거져 높다랗고 거대한 녹색 터널을 만드는 도로마저 지난 후 도착하게 되는 집에 오면 딸을 만날 수 있겠거니, 하고 짐작하던 호택의 귀에 이런 은숙의 대답이 들려 온다.

“응, 조금 전에 와서 텔레비전 보고 있어. 아, 저녁은 돼지등갈비 할 생각이야. 연지가 집 밥 먹고 싶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들어 보려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정말? 빨리 가야겠네. 알았어. 일단 들어 가면 연락할게. 끊어.”

그렇게 간략한 대화 몇 번이 오가고 난 뒤 전화를 끊은 호택의 시야에 차 밖의 다른 무언가가 들어온 것은, 때마침 바로 앞에 있던 차가 두 걸음쯤 앞으로 전진할 때였다. 점점 호택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시계탑의 기다란 분침은 어느새 여섯 시 정각을 향해 치닫고 있고, 누르스름하던 하늘의 빛깔 역시 붉은 기가 강해지면서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바로 그 때, 창 밖에서는 기타를 치면서 입을 크게 벌린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한 여자가 보인다. 길고 검은 머리칼에 검은색 베레모를 쓴 여자의 오른손이 천천히 기타의 사운드 홀 (Sound hole) 위를 아래위로 스쳐 지나가는 동안, 여자가 입은 자주색 코트의 자락이 불어 오는 미풍에 나부낀다. 정면에 보이는 시계탑을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한 점을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은 버스 정류장 옆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뉴욕의 빌딩 숲을 날아다니는 울긋불긋한 깃털의 앵무새처럼 보인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어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사람과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버스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노래하는 여자가 장승처럼 옆에 서 있는 버스 정류장에 다다른 순간, 호택은 자동차의 창문을 연다. 이러한 풍경이 호택에게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지루했던 일상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그 여자의 노래가 궁금했던 것이었을까. 호택이 탄 자동차의 창문이 열리자, 정류장에서 열창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제야 산들바람과 함께 호택의 귓가에 라디오 음악처럼 맴돈다.

대나무는, 우뚝 있는 대나무는. 100년에 꽃을 피운다네.
자주 수는 없는 광경이라네.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아로새겨진 가사가 귓가에 들려오자 마자, 그것이 그에게 아주 진한 커피가 된 듯 호택의 눈이 번쩍 떠진다. 그 노래고 특별한 명곡이어서가 아니었다. 여자의 노래는 분명히 어느 음원 차트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무명의 싱어송라이터의 손에서 태어나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노래일 수도 있었겠지만, 호택은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호택의 무의식 저편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옛날을 풍미했다가, 그 시절 대부분의 기억이 그러하듯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던 노래였다. 게다가, 호택의 귀에 들려 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 기억 속 유일한 흔적처럼 남아 있는 목소리와 한 치의 오차 없이 비슷하다. 행여 자신이 때 아닌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던 호택은 잠시 옆쪽을 돌아본다. 여전히 여자는 기타를 잡고 노래를 하며, 호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로 잊혀져 가는 노래를 내뱉는다. 우연히 오래된 친구를 마주친 듯, 호택은 천천히 앞으로 차를 몰면서 시계탑을 지나가면서도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다 거대하고 불그스름한 치마처럼 온 하늘에 퍼졌던 노을이 그보다 배는 더 거대한 검은 코트로 뒤덮였을 때, 그리고 시계탑과 여자가 모두 호택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에나 줄곧 열려 있었던 자동차의 창문을 닫는다.

시계탑을 지나고 난 후, 그 근처에 펼쳐진 오거리에서 호택의 앞에 즐비했던 자동차는 각기 자신이 갈 방향으로 낙엽처럼 흩어진다. 호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오른발 끝에 걸린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는다. 도로 양 옆을 메운, 플라타너스와 콘크리트 빌딩이 어우러진 숲을 헤치며 호택은 조금 전에 들었던 노래처럼 잊혀져 가던 기억을 다시 되짚는다. 그가 지나온 시계탑의 모양이 달랐었던2, 그 부근에 홈플러스 대신 버스 터미널이 있었던3, 그리고 그 노래가 처음 호택의 무의식에 각인됐던 순간으로.


소년은 평범하게 자랐다.

그 시절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확성기에 울려 퍼지는 <새마을의 노래>로 아침을 맞고 저녁 6시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방과 후에 골목에서 말뚝박기며 축구, 발야구를 하고 여름 방학마다 늘 곤충 채집을 하러 들판을 쏘다녔다. 그렇지만, 해진 고무신을 신은 동네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고무줄 놀이하는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거나, 치마를 들추며 “아이스 께끼”라고 외치는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굳이 여자아이들만이 아니더라도, 소년은 그렇게 사람을 놀리고 괴롭히는 것을 꺼려했고 싫어하는 편이었다. 짓궂은 아이들이 그런 소년을 ‘샌님’이라고 놀려 대기는 했지만, 다행히 해코지를 당하거나 외톨이가 되는 불행은 겪지 않았다. 단지 소년의 어머니가 동네 어르신들께 ‘기가 세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사람이었고 거기에다가 목소리 큰 누나들이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소년이 자라 열 일곱이 되었을 때, ‘교복 자율화’라는 말이 신문과 뉴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솜털이 채 빠지지 않는 두 뺨에 닿는 높새바람이 산뜻했던 봄날 동네 친구들이 너도나도 입기 시작한 것처럼 품 넓은 데님 재킷에 통 큰 청바지를 입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 빼고는 엄격한 부모가 원하는 길, 즉 학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훌륭한 대학에 가게 되는 길을 두말 없이 갔던 소년이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소년은 몰랐고,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난할 줄만 알았던 소년의 열 일곱은, 해가 높아지고 매미 우는 소리가 커졌을 때 전혀 다른 빛깔로 칠해지게 되었다.

그 날, 토요일 보충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 오던 소년은 문득 배가 텅 비어 버린 듯한 허기를 느꼈다. 한창 먹성이 좋을 나이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도시락으로는 배가 채워지지 않아, 하교 길에 중앙공원 뒤쪽으로 오롯이 줄 지어 있는 상점 주위를 서성이던 소년은 그 중 한 식당에 발을 들였다. 여름이면 메밀국수가, 겨울이면 우동과 돈까스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그 식당에는 웬일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그 적막했던 식당에서, 기타를 아담한 등 뒤에 맨 한 여자가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메밀국수를 사 먹을 돈이 없어 계산을 하지 못하고 있던 여자가 어린 마음에도 딱해 보였던 소년은, 결국 지갑에 들어 있던 돈의 거의 전부를 내고 두 사람 분의 메밀국수를 주문해 주었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여 놓고 있었던 그 여자는, 소년이 메밀국수를 허겁지겁 먹어 치울 때까지도 소년이 앉은 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소년이 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무렵, 여자는 자신 몫까지 합친 돈을 내 준 소년을 좇아 중앙공원의 입구까지 따라 들어왔다. 상투적인 감사 인사에 멋없는 통성명이 오가고 난 후,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대뜸 소년을 빤히 바라본 채 이렇게 대답했다.

“손호택이라, 학생인가 보네. 그 쪽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학교 앞에서 본 것 같아. 아무튼 반갑다, 소년. 난 강혜성이라고 해. 아까 전에 돈 빌려 준 건 고마웠어. 나도 무언가 대단한 걸로 답례를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노래밖에 불러 줄 수 없을 것 같아…내 노래, 한 번 들어 볼래?”

자신을 ‘혜성’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기타 가방의 지퍼를 열고 있었을 때, 소년은 멋모를 ‘네’만 툭 내뱉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소년의 마음을 간질이기 시작한 것은 혜성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그 말미에 소년을 바라보았던 그녀의 큼지막한 두 눈이었을까.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소년을 여전히 지긋이 바라본 채, 혜성은 매우 능숙하고 여유롭게 기타를 제 품에 안았다. 기타의 여섯 현을 네 손가락을 펼치고 헛기침 몇 번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혜성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대나무는, 우뚝 있는 대나무는. 100년에 꽃을 피운다네.
자주 수는 없는 광경이라네.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모란과 달리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미나 재스민처럼 향기롭지도 않지만.
어지러운 세상에 올곧게 자란다는 것, 그것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거니까…지금까지는 여기까지밖에 안 떠올려지네.”

혜성이 노래의 말미를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그렇게 흘려 버리며 멋쩍은 웃음기가 섞인 말을 내뱉기 전까지, 소년은 그저 말 없이 혜성의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그 노래가 설령 단 한 번도 익혀 보지 못한 가사,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가락,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박자를 지니고 있다 해도 소년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는, 말투에서 묻어나던 아이 같은 장난기가 사라졌다.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원 주위를 맴도는 바람이 되어가는 동안, 소년은 혜성 뒤에 비친 햇빛이 유독 눈부시고 찬란해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날씨가 이토록 아름다웠었나, 하는 혼잣말을 소년은 그저 가슴에만 묻어 두었다.

그 다음부터 소년은 혼자 외출할 때마다 일부러 중앙공원을 지나가게 되었다. 소년이 마주한 혜성은 병마절도사영문4이나 망선루5를 손바닥만한 기계로 찍거나, 작은 종이뭉치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혜성이 작은 전화기 이자 사진기, 그리고 우체통처럼 쓰고 있던 그 벽돌같은 것이 무엇인지 그 때의 소년은 몰랐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 듯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공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혜성은 소년의 눈에 정체 모를 탐험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행동을 하는 혜성의 모습이 너무 막중하고 진지해 보였기에 소년은 감히 혜성이 하는 일에 대해 물어 볼 수 없었다. 대신, 공원에서 혜성을 마주치면 늘 진득하게 혜성의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은 혜성의 곁에서 공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동안 알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세상의 일부분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작은 기계로 사진을 찍으며 ‘대나무 꽃’이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혜성과 맞닥트리면 누군가는 옆 사람을 보며 수근거리고, 눈에 당연한 듯 가벼운 경멸을 품은 채 혀를 차면서 지나가고는 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얼굴이 곱다’고 하며, 더러는 ‘옷차림이 조금은 독특하다’고 하며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공원을 지나가면서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사람들이 뭘 모른다’고, 소년은 공원의 거대한 은행나무 고목6 옆쪽을 지날 때마다 되뇌었다.

어떤 날에는 그저 우연히 만난 것처럼, 어떤 날에는 정말로 약속한 듯 근처 통닭집에서 산 통닭을 들고 찾아 왔지만 그 때마다 혜성이 보인 반응은 한결 같았다. 혜성은 좀처럼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일 없이, ‘소년’이라던가 ‘택이’ 같은 사뭇 가벼운 호칭으로 대했다. 그렇지만 소년은, 혜성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그러한 호칭만큼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날에는 수많은 자작곡들 중 하나를 불러 주었고, 어떤 날에는 ‘미래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며 헛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는 했던 혜성이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매번, 그 미소에서 봄날의 싱그러운 아카시아꽃을 떠올렸다. 혜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올 때, 소년은 길목에 자라는 아카시아나무 가지를 따 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번갈아 되뇌며 잎을 한 개씩 떼내고 마지막 남은 잎이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일마저 혜성을 떠올리면 전혀 유치하지 않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소년의 감정은 그저 소년 자신만이 오롯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물론, 모이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귀결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년은 혜성과의 나날을 감추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타면 사라져 버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년은 그 감정을 아무에게도, 심지어 혜성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그 마음을 들킬 뻔한 적은 있었다.

“누나, 전 가끔 저 새들이 부러워요.”

어느 날엔가, 나무 밑에 튼 둥지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새끼를 키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제비 부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소년은 말을 꺼냈다. 가족에게도, 막역한 친구에게도 꺼내 본 적이 없던 말이 혜성 앞에서는 술술 나오고는 했다. 혜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을 혜성 역시 자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소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끊임없이 몸을 놀리는 새들을 똑같이 바라보고 있었을 혜성은, ‘왜?’라는 질문을 내뱉는 대신 물끄러미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혜성에게는 ‘왜’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한 소년은, 혜성과 제비를 번갈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쟤네는 일정한 시간만 되면 어디로든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잖아요. 전 여기를 떠날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 소년. 너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이라는 세계를 누비는 여행자인걸?”

슬쩍 어깨를 으쓱하며 꺼낸 혜성의 한 마디가 제비의 지저귐 속에 섞여 들어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삶에 대한 많은 부분이 막연하기만 했던 소년은, 혜성이 읊조린 말의 의미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의 의미가 그저 설익은 허세에 가까웠다 해도 소년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혜성의 눈동자에 비친 햇빛, 바람에 흩날리는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섞여 들어간 새들의 지저귐이 그 어느 풍경보다도 소년의 가슴을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유람선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 눈빛을 자리한 채, 혜성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만일 우리가 저 새들처럼 철마다 다른 곳을 오가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시간까지 오갈 수 있으면 어떨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내일이 올 때까지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그렇지만 먼 미래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 자동차로 부산까지 가고 비행기로 먼 외국까지 가는 것처럼, 우리가 먼저 미래로 가서 어른이 된 우리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날이 오겠지. 반대로 미래의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이 그리워, 다시 이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올 날도 있을 거고.”

그렇게 말하며, 녹음이 짙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흩어져 여러 갈래로 날아가는 제비 떼를 바라보던 혜성의 눈에 드리운 그늘이 왠지 창백해 보였다. 마냥 발랄한 아이 같을 줄만 알았던 혜성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정신없이 요동치던 소년의 마음도 느닷없이 고요해지는 것만 같았다. 혜성의 모든 것이 그의 무의식 주위에 맴도는 하늘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소년은 자신이 이토록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의 의미를 되짚어 파악할 새도 없었다.

“누나 말대로 설령 그런 날이 온다면, 그 여행길에 저도 데려다 줘야 해요. 그곳이 머나먼 미래가 됐든, 과거가 됐든 간에. 저도 누나가 앞으로 보낼 시간의 일부가 되고 싶으니까.”

말을 끝내자마자 무언가 급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숙여 버렸기에, 소년은 그런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던 혜성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미처 알아차릴 길이 없었다. 허리를 곧추세워도 기껏해야 소년의 귀 언저리에 정수리가 닿을 키의 혜성이었지만, 소년의 심정은 체격이 우락부락한 학생 주임이나 자신 없는 시험 성적표를 마주했을 때와 같았다. 짐짓 민망해진 소년은, 두 볼에 살짝 오르는 열기를 애써 감춘 채 이렇게 얼버무렸다.

“…만약 혼자 가게 된다면, 편지라도 써 줘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써 달라’는 세샘트리오의 노래7도 아니고, 이게 무슨 멋없고도 낯간지러운 말인가, 하는 생각이 소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숨고 싶다는 생각마저 그에 이어 무의식 위에 아로새길 무렵, 혜성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치기 어린 소년의 ‘고백’이 귀엽게 들렸는지, 아니면 자신의 말에 혜성의 흥미를 유발했을 무언가가 있었는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미소는 장마 직후의 맑은 날씨처럼 소년의 마음 안에 들어 와, 무심천8 냇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날 코스모스처럼 자라났다. 분홍색, 자주색, 그리고 흰색 꽃송이를 바라보며 맑게 웃을 혜성을 머릿속에 그린 소년의 두 볼은 과꽃 빛으로 상기되었다.

꼭 무심천 냇가가 아니더라도, 중앙공원 앞에서 파는 쫀득쫀득하고 달달한 호떡을 들고 공원을 거닐며 깊어 가는 가을을 함께 보내리라고 남몰래 생각했던 소년의 작은 꿈은 불행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천 년도 더 된 은행나무에 빼곡히 달린 나뭇잎들의 가장자리가 노랗게 변하기 시작할 무렵, 그 사이에 흘러가 버린 여름방학처럼 혜성도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온 공원을 다 둘러 보아도, 누구도 듣지 않을 노래를 불렀던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그 길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 왔던 것 같다. 닻을 잃어 버린 배처럼 성안길을 배회하던 소년은 모든 것을 빼앗긴 양 서럽게 울었을까, 아니면 짙고 복잡한 감정을 목놓아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을 짓누른 채 그저 한숨만 내쉬었을까. 먹구름처럼 자욱한 숨을 내뱉으면서, ‘이왕 이렇게 갈 거였다면 편지라도 써 주고 가지’라 생각했으려나.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어딜 갔다 이제야 들어오냐’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뿌리치고 방에 들어간 다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개학을 맞을 준비를 하다가 머리 속에 각인된 혜성의 노래에 그제야 눈물을 흘렸을까. 소년은 그 이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그 이후로 펼쳐진 삶이 소년에게는 너무나 복잡했고, 그 삶의 궤도 위를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한동안 일부러 중앙공원 근처로는 지나가지 않았고, 아주 아름다웠던 꿈에서 깨어 난 듯 몽롱하게 보냈던 나날도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해 가을의 제비는 늘 그랬듯 강남으로 날아갔고, 소년은 자신의 무의식에 남았던 노래 속 대나무에 꽃이 피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그 과정에서 무던히 익숙해진 일을 시작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그렇게, 열 일곱이었던 해의 여름 중앙공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완전히 잊어 가는 줄만 알았다. 그 오래된 공원도, 호떡도, 메밀국수도, 통닭도, 제비도, 기타도, 그리고 대나무꽃도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은 평범한 낱말들로 변했던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기까지입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이번 발표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슬라이드에 대한 발표까지 마친 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는 모습에 동요하지 않은 채 혜성은 애써 덤덤하게 말을 끝냈다. 똑같이 검거나 흰 정장을 입은 청중을 멀리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목에 매달린 사원증의 줄 색깔로 알아보는 것뿐이었다. 직속 사수인 백 대리는 노란 줄을 건 채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고, 마치 혜성이 발표가 아닌 콘서트라도 마친 것처럼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인턴 동기들은 하나같이 녹색 줄이 달린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질문을 기다리는 동안, 혜성은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주) 마이그런트9 (Migrant Inc.)’의 사명이 영어 필기체로 제법 화려하게 새겨진 녹색 줄을 손가락 끝으로 살포시 만지며, 혜성은 발표 준비를 하며 보았던 풍경들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혜성의 일상과 비슷하면서도 언뜻 달라 보였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살던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공원에는, 혜성이 볼 수 있는 고층 빌딩보다도 더한 위엄을 풍기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혜성이 발표 준비를 위해 그 공원을 드나들었을 때, 그 나무는 뻗어 있는 가지마다 층층이 돋아 있는 초록색 잎들로 울창했다. 혜성의 여름은 그 아득한 푸르름 속에서 발표 준비를 하며 흘러 갔지만, 발표 예정일이 임박하고 촉박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 공원에 다시 찾아 가 볼 생각조차도 할 시간이 없었다.

2087년에 설립된 이후로 20년째 대한민국 굴지의 시간 여행사로 업계를 지키고 있는 ‘마이그런트’에 있어 10월은, 당해 입사한 인턴과 신입사원이 돌아가면서 개별 발표를 진행하는 ‘김&밀턴 (Kim&Milton) 정기 발표회’가 열리는 달이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여행에 대한 꾸준하고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2076년에 기어이 실현 가능한 이론을 구상해 낸 미국의 물리학자인 허버트 밀턴 박사와, 이를 이용해 타임머신을 직접 만들어 낼 정도로 뛰어난 공학자이자 밀턴 박사의 제자였던 김영주 박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신입사원들에게 단독으로 새로운 시간여행 상품을 구상하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발표하게끔 하여 ‘두 사람의 도전정신과 직관력, 그리고 창의성을 띈 인재를 발굴’ 하는 것이 발표회의 과정이었고, 이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발표에서 과반수의 호평을 받은 인턴은 다음해에 곧바로 정직원으로 전환되었고, 신입사원들에게는 인사고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그런 만큼 실제로 발표를 진행한 것은 해당 부서의 직원들 앞이었지만, 사실은 회사 전체에 녹화 중계되어 대표이사에게 까지 전달될 정도로 중대한 발표였던 것이었다.

발표장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슬라이드를 여전히 띄워 둔 채 잠자코 있었던 혜성은 여러 개의 손이 올라간 것을 보자 비로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혜성이 가장 먼저 지목한 사람은, 혜성의 바로 전 순서에서 발표를 진행한 신입사원이었다.

“먼저, 발표 잘 들었습니다.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수많은 시간 여행 명소들 중 왜 청주를 선택했습니까?”
“발표를 준비하며 가상 여행 상품을 구상하는 동안, 이왕이면 직접 답사해 보고 발표를 하면 더욱 현실성 있고 생생한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용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용이한 국내를 답사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고, 관광상품으로 개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시간여행 장소를 찾다가 청주의 중앙공원에 위치한 비석을 찍은 사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었던 것이라, 혜성은 며칠 동안 연습했던 대로 또렷하고 차분하게 대답한 후 중간 지점에 있는 슬라이드를 바로 모니터에 띄웠다. 웅장한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병마절도사영문과 망선루를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오자, 한 구석에서 와, 하는 외마디 감탄사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혜성은 헛기침을 잠시 내뱉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청주 중앙공원에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유물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손꼽히게 오래된 고목이 그 터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중앙공원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원들은 전국에 많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의 탑골공원과 인천의 자유공원 등 수도권의 오래된 공원들과는 달리, 청주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관광상품으로 개발되는 대신 그저 지나가는 시민들의 일상에 스며든 채 유지되어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드문,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일상의 정취를 체감하고자 직접 과거의 청주로 건너 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주는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이 곳의 시민들은 자신의 일상을 바쁘게 살아 내면서도,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친절합니다. 저는 과거의 청주를 탐방하면서, 아렴풋하게만 알았던 전통 사회의 ‘정(情)’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의 문화재들이 이토록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채 도심에 섞여 있는 것도, 오래도록 자신들의 곁에 머물러 준 존재들을 부정하거나 지우지 않으며 그 소중함을 알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답사하고 자료를 찾아 온 노력이 돋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없을까요?”

혜성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번쩍 든 동기 인턴 한 명은, 큼지막한 눈을 빛내며 혜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저돌적인 태도가 혜 왠지 재미있게 느껴져, 혜성은 나지막하게 한 번 웃음을 터트린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네, 처음 청주에 도착했던 날 가지고 있던 돈이 들어 있는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누군가가 훔쳐가지는 않아서 돌아오기 전에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에는 굉장히 곤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어 시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갑을 찾아 준 경찰은 물론이고, 식사 값을 낼 수 없어 쩔쩔맬 때 돈을 빌려주지 않은 친구가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혜성이 말을 마치자마자, 좌중 구석구석에서 아, 하는 나지막한 안도의 한숨이 여러 번 흘러 왔다. 중앙공원에 처음 도착했던 순간이 별안간 혜성의 머리 속에 주마등처럼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내 회계부에서 어렵게 구해 온 20세기의 화폐가 송두리째 사라진 일은 분명 아찔했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그 공원에서 더없이 소중한 인연을 만들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데님 재킷을 입었던, 자신을 ‘누나’라 불렀던 소년의 앳된 얼굴이 불현듯 혜성의 무의식에 나타났다가, 다음 질문이 들려온 순간 혜성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발표를 들어 보니 1980년대의 청주에 대해 굉장히 깊고 자세하게 파고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하셔서 꽤 오랫동안 머무르신 듯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계획안이 만일 실제 ‘마이그런트’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다면, 고객들 역시 혜성 씨와 같이 재방문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톡 쏘는 탄산음료를 연상하게 하는 말투로 질문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은 직원의 날카로운 눈매와 시선이 마주치면서, 혜성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 직원의 사원증을 연결하는 줄은, 혜성이 근무하는 사업기획부의 부장이 걸고 있는 줄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적어도 타 부서의 부장급은 되는 사람에게서 예리한 질문을 받을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혜성은 겨우 숨을 가다듬으며 일부러 차분하고 점잖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일상의 정취를 체감’하고자 했다는 동기를 다시 한 번 언급하며, 발표 때 피력했던 ‘1980년대 청주의 메리트는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발전이 공존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시대적, 지역적 특수성이 관광객들에게 큰 매력이 될 것’이라는 강점도 언급하니 그 직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그렇지만 혜성은, 맑은 얼굴을 한 채 머나먼 과거를 살아가던 소년이 박수치는 청중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기시감을 떨칠 수 없었다. 혜성이 그 과거의 청주를, 그리고 그 공원에서 오래 머물고 그러면서도 또 다시 찾아왔던 진짜 이유는, 그 소년과의 만남을 흘려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표 준비를 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더 길었다면, 혜성은 소년에게 김춘수의 시집을 한 권 선물해 주고 싶었다. 소년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유명했다고 알려진 시인들 중 혜성이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올려 볼 수 있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그 시에 있는 구절인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10에서 그 소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혜성은 대학가의 중고 서점에서, 마지막 재고로 남아 있었던 <김춘수 시선>을 구할 수 있었다. 낯선 듯 정겨운 풀 내음마저 나는 듯한 시집을 한 페이지씩 넘기며, 혜성은 그 때마다 전날 만나고 온 듯 살아나는 기억 속의 소년을 떠올렸다. 기타를 튕기며 불렀던 자작곡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늘 ‘평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다정했던 소년은, 혜성에게 겪어 본 적 없는 아득한 시간과 계절을 연상하게 했다. 그녀가 속한 세계의 그 누구도 면밀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인간이 무의식 속에 본능을 숨기며 살아가는 것처럼 마음 한 켠에 잔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에 뚜렷한 빛깔을 입혀 준 것도 그 소년이었다. 대학 동기나 선배와 서로의 서툴다 못해 조악한 심리의 단면을 나누며 그 관계가 사실은 덧없이 유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한 채 ‘영원’을 공허하게 외쳤던 감정이 아니라, 책이나 영화에 생기를 입히고 노래 가사 속에서 향긋하게 머물며 먼지 쌓인 ‘고전’에 의하면 누군가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었다고 하는, 그런 간질간질하면서도 자국을 낼 만큼 강렬하고 마지막에는 그 자국이 멍든 것처럼 쓰라린 감정이었다. 당분간 소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혜성은 그 일련의 감정을 선조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엇인지 혜성에게 처음 가르쳐 준 이도 그 소년이었다. 하늘이 높아졌을 때,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질 때, 제비가 별안간 남쪽으로 날아가고 과일가게에 신선한 사과가 들어 오기 시작할 때, 그리고 공원의 은행나무 고목에 수북한 초록색 잎사귀가 햇빛을 머금고 모두 노랗게 물들 때를 ‘가을’이라고 부른다고 소년은 말했다. 소년의 말대로라면 10월은 ‘가을’이 한창일 때겠지만, 혜성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가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뭇잎은 초록색 대신 다른 빛깔로 물들지 않았고, 바람도 선선해지지 않았으며 ‘사과’나 ‘제비’는 할머니께서 들려 주시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만 어렴풋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백 년 전 기후변화가 극심해지면서 ‘가을’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수십 년은 됐다고, 학교에서 배웠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혜성은 발표 준비 기간이 조금 더 연장되기를 내심 바랬다. 소년이 말했던 ‘가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느낌은 얼마나 새로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은행잎이 온통 노랗게 물든다는 것이, 하늘이 높아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할 수만 있다면 그 풍경이 선사할 아름다움을 다정한 소년과 함께 나누어 보고 싶다고, 혜성은 생각했다.

과거의 그 공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혜성은 ‘가을’을 잃어버렸다.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함축되었다는 감정 역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혜성은 곧장 자신이 사는 원룸으로 달려갔다. ‘뒤풀이로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는 동료들의 초대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도착한 집에서, 책상에 고스란히 올려진 김춘수의 시집과 그 옆에 기울여진 기타가 혜성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 순간, 혜성의 시간에서 백 년도 더 된 과거에 존재했던 그 공원의 풍경이 그녀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했다. 어쩌면 아주 긴 꿈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끝날 무렵, 일상으로 돌아갈 때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 혜성은 곰곰이 생각했다. 발표회의 질의응답 시간 말미에 홀로그램처럼 혜성의 무의식을 돌아다녔던, 그 때의 그 소년이 다시 한 번 혜성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 순간, 소년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혜성은 깨달았다. 소년을 자신의 세상으로 데려오기는커녕, 편지 한 장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혜성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야 자유롭게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가설일 뿐이었을 시대에 살았던 그 소년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하고 혜성은 떠올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면, 설령 그 원인이 불가항력적이라 해도 작별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하였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들이 ‘갑작스러운 이별’로 귀결되는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간과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들고 있던 가방에 시집을 넣고 기타를 등에 멘 채 집을 나서면서, 혜성은 자신이 과거의 그 공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잃어버렸던 ‘가을’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럴 수 없다 해도, 최소한 그 소년에게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는 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마이그런트’ 사옥 옆에 위치한,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타임머신 터미널’의 국내선 대기실 근처에서 혜성은 과거의 청주로 오가는 왕복 티켓을 끊었다. 계획했던 20세기 후반으로 건너갈 수 있는 표는 공교롭게도 단체 시간관광으로 모두 매진되어 버려, 궁여지책으로 21세기 초반의 언저리로 향하는 티켓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그런트’ 사원증을 제시하면 받을 수 있는 할인 혜택 중 가장 파격적인 할인 값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부상열차를 연상하게 하는 다인승 타임머신에 몸을 싣고 자리에 앉은 뒤에야, 혜성은 자신의 핸드폰 속 모바일 예매권에 적힌 행선지를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2019년 10월, 청주.

2019년이라면, 전 세계를 뒤흔들어 버린 전염병이 창궐할 때로부터 1년 전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혜성이 건너갔던 시대와 다른 듯 엇비슷한 일상을 살던 마지막 해인 것과 다름없었고, 기억 속에 있는 소년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니, 그 소년을 더 이상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도착했던 청주에서의 1983년에 소년의 나이가 열일곱이였으니 아마도 5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그 옛날 중앙공원에서의 ‘소년’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행여나 목적지에서 잊어버릴 까봐, 혜성은 가방 안에 든 시집을 만지작거리며 기억 저편에 묻혀져 있던 소년의 진짜 이름을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호택아.”

혜성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릿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진 아버지뻘의 중년 남자를 넌지시 부른다. 혜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는 바람과 섞여 살짝 떨린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눈 앞에 있는 남자는 다행히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네…누나.”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익숙한 듯 낯선 땅과 눈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행여나 생생한 현실 같은 꿈은 아닐지에 대한 의심이 남자의 대답 한 마디에 혜성의 마음에서 사라진다. 혜성이 사라진 시점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수의사가 되어 시계탑 오거리 근처에 동물병원을 개업했고 대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가장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한 그 남자는, 더 이상 몇 천원 어치 메밀국수 값을 쩔쩔매며 내던 소년이 아니다. 그러나, 남자가 혜성에게 건네는 눈빛과 덤덤한 듯 떨리는 말투는 수십 년 전 같은 장소에서 마주쳤던 그 때의 그 청 재킷 차림의 소년의 목소리와 시선을 담고 있다고, 혜성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눈 앞에 있는 남자는, 틀림없이 흐릿한 기억 속의 소년이었고 무의식 저편으로부터 걸어 나온 호택이었다. 그 시절 그대로의 다정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인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하는 것 같은 호택에게, 혜성은 덤덤하게 자신의 정체와 그간의 경위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긴 이야기를 털어 놓을수록, 혜성은 삼키지도 않은 커다란 돌멩이가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박힌 듯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혜성은 툭 건드리면 쏟아져 내릴 만큼 위태로운 감정을 부여잡은 채 울지 않으려 노력한다. 혜성에게 그 순간은 아직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었다. 청주에 도착한 이후 행여나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온갖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일부러 기타를 연주하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가 마침내 돌고 돌아 재회한 그 순간을, 청승맞게 우는 일 따위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아직은 울고 싶지 않다’고 끊임없이 암시하듯 되뇌이던 혜성은, 호택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갈 때쯤에야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대답한다. 발표회를 연습했던 것만큼 몇 번씩이나 되뇌인, 혜성의 깊숙한 진심으로부터 꺼낸 사죄였다.

“그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저는 이토록 많이 변해 버렸는데, 누나는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편지 한 번 안 남기고 떠나 버린 누나를 한참 동안 찾았어요. 너무 오래 기다렸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찾아오셨네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급히 갈 수밖에 없었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오래 걸려 버렸어. 그 동안, 다시 여기로 올 수만 있다면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편지 한 장도 못 주고 가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적어도 너에게만은, 짤막한 인사 한 마디만도 남기고 갔어야 했는데. 미안해. 이젠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요. 이젠 다 지난 일인걸요. 그리고 늦었긴 뭐가 늦었나요, 누나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만 해도 반가운데.”

사근사근한 말투로 부드럽게 대답하는 호택의 말에 혜성은, 조금 전과 비슷한 형태의 감정이 다시 목 언저리를 옥죄는 것 같아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대신,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며 아득하게 거대한 은행나무를 올려다 본다. 가로등 몇 개가 그 우람한 줄기의 아래쪽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출 뿐이었던 은행나무는, 그 위에 십대의 소년과 소녀가 볼 미래만큼 아득한 어둠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끝도 없는 어둠, 어쩌면 우주 너머 다른 세계에도 닿을 수 있을 만큼의 높이에서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변한 은행잎들이 초겨울의 눈처럼 떨어진다. 언뜻 보면 특이한 모양의 결정을 가진 함박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나뭇잎들이 칠흑 속에서 밝은 빛 아래로 내려와, 두 사람의 발에 밟힐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내려앉는다. 혜성은 오른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눈 앞으로 느리게 낙하하는 낙엽을 두 손가락으로 잡는다. 손끝에 쥔 은행잎은 자그마한 부채 같기도,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입은 망토 같기도, 서툰 솜씨로 그린 하트 모양 같기도 하다.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고 노란 염료를 뒤섞은 것 같았다. 혜성은 가로등 불빛에 비춰진, 수만 개의 작고 노란 깃발을 걸은 것처럼 보이는 은행나무 고목과 그 주변을 감싸는 모든 존재들이 진짜 같은 꿈은 아닌지 잠시 의심한다. 그러나 단순히 착각이나 환상, 또는 정교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환영이라 치부하기에는 혜성의 두 뺨에 맴도는 바람의 냉기가 너무도 가깝게 느껴진다. 그제야 혜성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별안간 시야가 흐려지고, 축축한 한 줄기 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듯한다. 가을이었다. 혜성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완연한 가을이었다.

호택은 그런 혜성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 것에 더 가깝다. 다만 눈물을 흘리는 혜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맨 손으로 만지면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데일 것 같은 호떡을 한 개 쥐어 줄 뿐이다. 호떡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던 중앙공원에서의 시간들이 혜성의 무의식에 다시금 선명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여름날의 추억은 입 안에 든 호떡의 조각처럼, 뜨겁게 달콤하고 날카롭게 강렬했다. 돌아 오길 잘했다, 는 생각이 혜성의 머리 속에 스친다. 그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시간과 단어들 – ‘가을’과 ‘사랑’ – 이 다시 혜성의 기억 속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흐릿해지던 기억 속의 그 ‘소년’이 다시금 혜성의 의식 속에 언제 떠났었냐는 듯 자리잡게 되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호떡을 오물거리고 있던 혜성을 향해 별안간 손짓하며, 호택은 천천히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갑자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속으로만 되뇐 채, 혜성은 쥘부채의 가장자리처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끝의 은행잎들을 응시하며 호택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혜성을 살피려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걸음을 떼는 호택을 지켜보며, 혜성은 이제는 수십 년 전의 과거와는 달리 호택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혜성은 자신의 발걸음에 걸리는 낙엽을 털어 내며 속으로 되뇐다. 이제는 호택이 혜성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그녀 자신이 호택에게 들려 줄 이야기보다 훨씬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밤의 적막에 휘감긴 채 조용히 잠들어 있는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며, 혜성은 자신이 끊임없이 가능한 만큼 특정한 과거의 청주 중앙공원으로 되돌아갔던 ‘진짜’ 이유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 회사 관계자들에게는 결코 꺼내지 못할 주제였다.

중앙공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호택과의 교류가 반복되면서 혜성은 오래도록 그 시간 속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랬다. 혜성은 가장 즐거운 날을 맞이하려면 최소한 한 해 정도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살아가는 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순간의 찬란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을 호택을 마음 속으로 부러워했다. 호택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렴풋하게나마 꿈꾸고 있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떠한 인간상이 되어야 한다면 자신은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만일 동물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살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다정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던 호택의 말에 귀 기울여주긴 했지만, 혜성에게는 호택의 그러한 ‘가정’ 자체가 막연하기만 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대로 돌아가거나 나아갈 수 있는 세계만을 알던 혜성은 호택이 말하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라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마냥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의 호택은, 마치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수많은 선물 상자의 내용물 하나하나를 궁금해하며 천천히 선물 상자를 풀어 보는 어린아이인 양 눈빛을 반짝이며 또렷하게 꿈과 희망 같은 온갖 좋은 감정을 말로써 피력했다. 그렇게 혜성의 가치관은 조금씩 변화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주는 아름다움을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밀턴 박사가 발표한 이론에 의해 시간 여행이 가시화되기 전의 인류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봄이면 새싹이 움트면서 꽃이 피고, 여름이면 비가 온종일 내리다가 어느 순간이면 햇빛이 따사로이 내리쬐고, 가을이면 푸르던 나뭇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면서 과일이 익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떨어진 낙엽과 시든 꽃 위를 뒤덮는 걸 진득하게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랬다. 텔레비전을 보며 채널을 돌리듯 자신이 좋아하는 순간으로만 가는 것이 아닌,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순간에서 좋은 점을 찾으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지 혜성은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떠올려 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청주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쭉 그 곳에서 호택처럼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조금은 소심하지만 다정했던 소년이 그 다정함을 잃지 않은 채 의젓하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천천히 수십 년에 걸쳐 함께 겪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호택과 그에 얽힌 모든 기억을 두고 떠나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괴로울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던 혜성의 생각은, 호택이 어느 순간 발길을 멈추었을 때 따라 멈춘다.

두 사람의 눈 앞에는 우후죽순 세워진 비석들이 가로등에 비쳐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마천루 같기도, 어떻게 보면 낡고 버려진 무대의 흔적 같기도 한 비석들을 찬찬히 둘러 보며, 호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공원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고 주위를 둘러 보던 혜성은, 시선을 돌린 곳에 망선루와 그 옆의 조그마한 척화비를 보고 그제야 기억의 마지막 파편을 더듬는다. 또 다시 상념에 젖는 것도 잠시, 호택이 별안간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혜성의 시선은 앞에 놓인 비석을 떠나 호택에게 머문다.

“사람들은 이 곳에 왜 이토록 수많은 비석을 세웠을까, 하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의 흔적을 남기길 원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러는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해, 더러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칭송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는데, 언젠가부터 비석을 볼 때마다 뜬금없이 누나의 자작곡이 떠올려지더라고요.”

호택의 덤덤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 나온 ‘흔적’이라는 단어가, 혜성의 귓가에 송곳처럼 세게 박힌다. 노래와 기타를 좋아해 학교 음악 동아리에 가입했고 틈틈이 자작곡을 만들기도 했었지만, 누군가에게 들려 준 것은 호택을 만났을 때가 처음이었다. 서툴게 들렸을 수도 있던 노래가 호택의 기억에 크게 남았다니,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진 듯 혜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호택은 그런 혜성은 흘깃 바라보고 난 뒤, 살포시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 노래에 나오는 ‘대나무 꽃’이라는 것을 검색해 보니까, 피어 나는 데만 백 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존재에 대해 노래하며,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 공원을 지날 사람들과 제 기억에 흔적을 남긴 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관리하지 않으면 먼지만 쌓이게 되는 비석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누나의 노래가 훨씬 나아요. 그래서 좋았다고, 변하지 않는 그런 ‘흔적’을 남겨 줘서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요. 그 노래를 기억할 수 있는 한, 저도 그만큼 더 오래 누나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을 끝낸 호택의 시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비석을 향한다. 잠시 그렇게, 전시회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비석에 시선을 둔 두 사람의 사이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맴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산책로 위로 갈색,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 낙엽이 첫눈처럼 내려오지만, 밤의 장막으로 뒤덮인 공원에서 이 모든 낙엽은 검은색으로 보일 뿐이다. 혜성은 문득, 호택과 비슷한 연배로 나이가 든 채 같은 길을 걸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타임머신을 통해서든,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로든 발 밑에 색색의 낙엽이 드리워진다면, 그리고 여전히 우뚝 선 은행나무와 비석을 볼 수 있다면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이가 든다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느낀다. 아니, 지금 혜성의 눈 앞에 있는 공원의 모습이 수십년 전 과거와는 달라 보이는 것과 같이, 그 때가 되면 느끼게 될 감상 또한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호택이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했던 것처럼, 지금 보내고 있는 모든 시간과 순간 또한 어떠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 흔적은 비석보다는 노래에 가까울 것이라고, 혜성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아름답지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노래와도 같을 그 ‘흔적’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바람이 조금 더 서늘하게 귓가를 스치고 나서야 혜성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추억’이었다. 혜성의 할머니가 알지도 못할 사과와 제비 이야기를 자꾸 들려 주셨던 것도, 자신의 과거를 지나간 것들에 대한 흔적이 아름다운 노래 가락 같은 이야기로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기억. 더 이상 자신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쓰지 않게 된, 마음의 세밀한 결과 자락을 나타냈다던 단어들이 혜성의 무의식 속에서 쉼 없이 헤엄친다.

혜성은 비석에서 눈을 떼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시집을 꺼낸다. 가느다랗고 멋스러운 글씨로 <김춘수 시선>이라 적힌 시집을 소중히 두 손에 든 채, 혜성은 살포시 호택의 옆으로 걸어 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시집을 불쑥 내밀면서도 혜성은 차마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이 너무 많아 그 중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복잡한 무의식 속에서 결국 한 마디를 꺼낸 듯, 혜성은 두꺼운 종이 뭉치를 책상에 올리는 양 둔탁하게 말을 꺼낸다.

“…이거 받아. 내 선물이야. 네가 비석과 노래로 날 떠올린 것처럼, 나도 이런 시를 읽을 때면 흔적 같은 게 마음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너였어. 너도 내 마음에 아주 크고, 깊은 흔적을 남긴 거였어. 그래서…”

오늘 일만큼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남기고 싶어.
입 안에 머물러 있는 문장의 끝이 있었지만, 혜성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한다. 시집을 받아 든 호택이 그런 혜성을 보며 무어라 말했던 것 같지만, 혜성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고마워요’라는 말뿐이다. 나름대로의 감정에 북받쳐 한참을 중얼대던 호택에게 달려가, 혜성은 그를 폭 안는다. 잠시 서늘한 가을의 바람 대신 사람의 온기를 느낀 혜성은, 이내 몸을 떼고 호택을 다시 똑바로 바라본다. 그제야 혜성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이 나온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감정의 매듭을 모두 풀었던 것인지, 막혀 버린 말과 진심도 혜성의 입에서 북받치듯이 튀어 나온다.

“…돌아올게. 꼭 지금이나 널 처음 봤을 때가 아니더라도, 네가 날 기다릴 수 있을 순간이라면 언제든 돌아올게. 그렇게 돌아와 네가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정말로 너의 삶을 사는 순간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서로의 마음 안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젠가 한 번쯤은 돌아올게. 그 때는 금방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고 있을게. 그 때까지 잘 있어 줘.”

소년.

혜성은 그 말을 끝내고, 천천히 호택에게서 돌아선다. 헤어짐을 직감한 호택이 건네는 ‘기다릴게요, 잘 가요, 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라는 작별 인사가, 바람에 실려 온 공원에 퍼져 나갈 것만 같다. 혜성은 호택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다가, 공원 출입구에 나왔을 때야 앞으로 걸어간다. 당장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러 탄다면, 기차역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차역 구석에 있는 ‘미래인용 통로’를 통해 타임머신을 타면 되겠지만, 왠지 이대로 하루를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혜성의 머리 속에 스친다. 검은색 기타 가방을 그대로 등에 멘 채, 혜성은 공원 앞 골목길을 정처없이 돌아다닌다. 혜성의 가벼운 발걸음은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 새 가로등과 낡은 보도블록, 청년들과 노인들을 스친다. 혜성은 그 안에서 자신과 호택, 그리고 한 때의 호택이었던 소년과 훗날의 자신인 노인을 떠올린다. ‘지금’이라고 생각한 시간조차 한 때는 옛사람들이 ‘한치 앞도 알 수 없다’고 일컬었던 ‘미래’였고, 결국 언젠가 ‘추억’이라는 말로 남길 수 있을 ‘과거’가 될 수 있다면, 혜성은 지금 자신이 스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지금’답다고 느낀다. 한 때는 가장 바래 왔던 최선의 상황이었고, 앞으로도 무의식 속에 아름다운 노랫말 같은 흔적을 남길 시간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카맣게 어두워진 하늘에는 새하얀 달이 눈동자처럼 밝게 떠 있다. 혜성은 골목길의 끝에서, 반짝이는 간판의 불빛이 작은 꽃밭을 이루는 성안길로 삼삼오오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리에 섞인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 그리고 지상에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별들에 둘러싸인 혜성은 그렇게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자신의 노래를 읊조린다. 호택에게 처음으로 들려 주었고, 앞으로도 제일 먼저 호택에게 들려 줄 노래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기억은 혜성에게 오롯이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과거가 되었고, 오롯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가 되었다.

대나무는, 우뚝 있는 대나무는. 100년에 꽃을 피운다네.
자주 수는 없는 광경이라네.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모란과 달리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미나 재스민처럼 향기롭지도 않지만.
어지러운 세상에 올곧게 자란다는 것, 그것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거니까.
오랜 생을 걸 만큼 피우고 싶은 꿈을, 떠나더라도 이루니 행복할 그런 삶을.
나는 꿈꾸고 있었던가,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싶어한 미래를.
어렵사리 피어 난 누군가의 꿈이 보여. 하얗게 별무리진 우리의 내일이 보여.
내가 피우고 싶은 건, 평범하고 올곧은 이들의 꽃 같은 웃음.

 

 

<나그네새> 작가 노트

우리가 정말로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이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였다면 얼마든지 머리 속에 떠올려 봤을 수도 있을, 어떻게 보면 흔한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시간을 여행한다면, 시간여행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단지 ‘재밌겠다’는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정말로 시간여행이 불어다 줄 가능성을 파악한 과학계에서 시간여행의 현실화를 이끌어 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아남은 어떤 기업이 시간여행을 마치 여행사의 관광상품처럼 홍보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분명 좋은 점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 뒤편의 그림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인간은, 자연의 섭리로 만들어진 것 중 자신들의 주관에 ‘아름답다’고 인지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정복하고, 소유하려 했다. 살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팔아 치워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것’은 또한 ‘상품으로 만들어 팔 수 있는 것’, 즉 ‘상품성이 있는’ 무언가가 된다. 아름다운 빛깔과 질감의 털을 가진 동물들, 찬란한 빛깔의 꽃과 과일을 가진 식물들, 그리고 인간의 눈에 ‘색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동족을 잃고 흩어지거나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고유의 가치를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고 황폐해져 가는 자연이다. 열대 우림의 울창한 나무들은 전기 톱에 쓰러지고, 극지방의 새하얀 빙하와 눈이 녹아 또 다른 경이로운 생명체의 터전을 말살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껏 보아왔던 것 중 가장 ‘상품성이 있는’ 것을 찾아 나서면서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자연의 마지막 끝부분까지 오간다. 그렇게 인간이 자연이 가진 모든 ‘상품성’을 소유하는 날이 온다 한들, 결코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을 빼앗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그들은, 결코 ‘시간’만큼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하고 싶다. 시간은 나무와 풀꽃들의 빛깔과 성질을 변하게 하는 사계절을 만들고, 해가 뜨는 낮과 달과 별이 뜨는 밤을 만들고 그 사이를 눈부시고 고운 빛깔의 노을로 물들인다. 시간은 어린 생명체를 장성하게 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에도 그들 곁에 공기처럼 머문다. 자연이 아름답게 자라고 농익을 수 있는 건, 시간이 제 속도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명의 이기에 맞부딪힌 자연이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본질을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자연을 형성하는 시간만큼은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떠한 기술이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듯 ‘자연만의 절대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마저 야욕에 가득찬 몇몇 인간의 손에 넘어가 그들의 입맛에 맞춰 변형되고 통제될 수 있다면 어떨까? 분명 현대 문명에 차원이 다른 혁신을 안길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우리에게 당연했기에 그 소중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사그라들게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 소설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통상적인’ 차원의 SF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관계를 이어가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흔해 빠진 클리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그네새>에서 내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시간 여행이나 단순히 아련하고 ‘예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만일 그 의도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면, 안타깝게도 나의 불찰일 것이다.) 시간 여행이 상용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주인공 혜성의 여정과 그녀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그리면서, 나는 그 누구도 통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가는 시간과 기억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다. 누구도 미래의 한 부분을 기대한다고 해서 그 부분만 앞당길 수도 없고, 과거의 일을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다. 학창시절의 첫사랑이 그립다고 해서 그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기억으로 남겨 두어야 아름다운 일, 천천히 오래 기다린 만큼 그 가치가 더해지는 일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소설이 끝난 시점 이후 혜성과 호택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혜성은 통제될 수 있는 시간 대신 자연 그대로 흐르는 시간을 사는 것을 택했고, 호택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통제할 수 없기에, 좋았다고 생각하는 기억마저 변치 않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가 즐기고 누려 왔던 많은 것들을 ‘추억’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새로운 누군가와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가 깊게 무르익어 것마저 쉽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은 듯 하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기억과 추억을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가 보내는 시간을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동안의 자신을 돌아보며 당연한 듯 흘려 보냈던 시간을 성찰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를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되는 기억과 추억인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소중한 가치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그네새>를 읽으며 바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놓쳐서는 안 될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

(추신: <나그네새>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충청북도 청주의 구시가지[중앙공원, 시계탑오거리 등]로,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며 본인도 유년시절에 여행 차 간간히 오갔던 장소이기도 하다. 작가노트에 적은 내용 외에도, 어머니께서 본인의 작품을 읽으실 때 일련의 추억과 향수를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선정하였다.)


  1. 충북 지역에서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송출되는 MBC FM4U 라디오 방송. (청주 지역의 주파수는 99.7mHz.)

  2. 현재 청주 시계탑오거리에 위치한 시계탑은 2009년 11월에 준공하였고, 그 전까지 있던 옛 시계탑은 무심천 인라인스케이트장 공원에 이전되어 있다.

  3. 1990년대 중반까지 청주고속버스터미널과 청주시외버스터미널이 사직대로변에 자리해 있었지만 고속터미널은 1994년, 시외버스터미널은 1999년에 흥덕구 가경동으로 이전되었다. 옛 버스터미널이 있던 곳에는 홈플러스가 자리해 있다.

  4. 청주 중앙공원에 위치해 있는 2층 정자. 조선 후기에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으며, 시도문화재 제 15호이다.

  5. 청주 중앙공원에 위치한 정자. 청주목 관아에서 공식연화를 여는 장소였으며, 이 곳 옆에 청주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 110호이다.

  6. 시도기념물 제 5호인 압각수를 말하는 것이다.

  7. 세샘트리오가 1978년에 발표한 <나성에 가면>, 특히 ‘나성에 가면 편지를 써 주세요.’ 라는 그 첫 가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8. 청주시를 흐르는 하천. 예로부터 청주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9. Migrant는 영어로 ‘이주자’, 혹은 ‘철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0.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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